연평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연평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국립민속박물관 ‘인천 민속조사 보고서’ 발간

조선, 봄·여름 고깃배 모여 조기 어획
 

한강오염·남획에 조기 씨 마르게 돼

어민, 작은 배 타고 꽃게 잡기 시작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연평도는 원래 꽃게섬이 아닌 조기섬이었습니다.”

3일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는 ‘2019 인천 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발간한 ‘민족조사 보고서’를 기자간담회를 통해 공개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동해안은 명태, 서해안은 조기가 많이 잡혔다. 특히 연평도는 서해안 최대 어획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선상에서 조기를 매매하는 조기 파시 역시 대성황을 이룰 정도였지만, 1968년 5월 이후 조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초, 그물로 조기 어획

역사적으로 보면 연평도의 대표적인 해산물은 조선시대부터 최근까지 ‘조기’였다.

정약전(1758~1816년)에 의해 1814년에 저술된 ‘자산어보(玆山魚譜)’ 제1권 인류(鱗類)의 첫 순서에 석수어(石首魚)가 소개돼 있다. 머리에 돌과 유사한 뼈가 있는 물고기라고 해서 부르는데 여기에는 애우치(大鮸), 민어(鮸魚), 조기(䠓水魚)가 분류돼 있다. 즉 애우치, 민어, 조기의 각기 다른 형태와 생태적 특징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단지 뇌에 돌이 박혀 있는 종을 묶어서 석수어라 통칭했다. 문헌에 따라서는 의미를 좁혀서 조기를 지칭하기도 했다.

연평도 동부리 된진낭 부근에 정박된 어선들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연평도 동부리 된진낭 부근에 정박된 어선들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조기는 농어목 민어과의 어류로 한반도 연안에는 참조기, 수조기, 부세 등 13종이 서식했다. 한국인은 다양한 조기 어종 중에서 참조기를 최고로 쳤다. 그래서 조기라고 하면 보통 참조기를 일컫는다.

조기잡이에 관해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임경업 장군 전설이다. 조선 16대 인조 대왕 14년(1636년) 임경업(1594~1646) 장군 이야기에 조기잡이에 관한 내용이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간 세자를 구하기 위해 출병하던 중 물과 부식이 떨어졌다. 이에 연평도로 입항해 숲으로 가서 가시나무를 베어오게 했다. 병사들이 베어온 가시나무를 모은이섬과 당섬 사이에 물살이 센 바다에 꽂아 뒀다.

만조 후 물이 빠진 틈을 타서 갯벌로 나갔더니 수많은 조기가 걸려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로 임경업 장군이 어업의 신으로 모셔졌고, 연평도에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물을 올리고 제를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전설일 뿐 실제로는 조선초기에도 조기를 잡았던 기록이 전해진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조기가 해주목 남쪽 연평에서 나고, 봄과 여름으로 이어지는 때에 여러 곳의 고깃배가 모두 이곳에 모여 그물로 잡았다. 관에서 그 세금을 거두어 나라 비용에 썼다’고 기록돼 있다.

연평도에서 조기를 언제부터 잡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조선 초기에 그물을 이용해서 조기를 어획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연평도 조기파시골목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연평도 조기파시골목 사진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1968년, 조기 사라진 이유

많을 때는 조기 어획어선과 상선이 2000~3000척에 달했다. 어선과 상선의 선원은 수 만명이었고, 이들을 따라다니던 상인과 작부는 수천명이었다. 조기잡이철에는 한적한 섬에 일시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조기가 사라지기 시작한 1968년 5월을 마지막으로 더는 조기 파시는 연평도에서 열리지 않았다. 조기가 잡히지 않은 것이었다.

조기가 사라진 이유는 두 가지였다. 김 학예연구사는 “첫째는 한강오염 때문이다. 1960년대에 한강이 오염되면서 조기 산란지가 오염됐다”라며 “전쟁이 끝나고 도시발전이 이뤄지는데 공장의 오염된 물이 한강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북한 황해도 해안 건설로 바닷모래를 운반했는데 모래가 없으니 조기가 알을 까는 곳이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남획이었다. 김 학예연구사는 “1960년대에 배가 동역선이 됐고 그물도 면에서 나일론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면 그물은 조기가 많이 잡히면 터져버리는데 나일론 그물은 단단하기 때문에 어획량이 늘어난 것이다.

연평도 갯벌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연평도 갯벌 (제공: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이후로 연평도 주민들은 김 양식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전라도와 충청도 등지에서 대량으로 부류식 김 양식을 시작하면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중에 갯병까지 들어서 이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기가 자취를 감추자 연평도 어민들은 작은 배를 타고 나가서 섬 주변에 그물을 치고 꽃게를 잡아서 일본으로 수출을 했다. 1970년대부터 꽃게를 일본으로 수출했으나 그 양은 많지 않았다.

이후 꽃게가 제값을 받기 시작하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꽃게 어획이 시작됐다. 연평도에 냉동시설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을 때 상온에서 인천으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꽃게의 신선도가 나빠져서 30~50%는 버릴 정도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꽃게 어획이 연평도의 주력 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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