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독립투사’ 연미당 선생, 7월 독립운동가 선정
‘여성 독립투사’ 연미당 선생, 7월 독립운동가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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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연미당·엄항섭 결혼식 모습(왼쪽)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모습(1940. 6. 17) (제공: 천안 독립기념관)ⓒ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1927년 연미당·엄항섭 결혼식 모습(왼쪽)과 한국혁명여성동맹 창립기념 모습(1940. 6. 17) (제공: 천안 독립기념관)ⓒ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3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의 토대를 마련한 여성독립운동가인 연미당 선생이 7월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2일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에 따르면, 연미당 선생의 본명은 연충효로, 1908년 7월 15일 북간도 용정에서 태어났다. 중국 세관에 근무하던 부친의 근무지 이동에 따라 상해 인성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고, 진강 여자중학교에서 수학했다. 부친 연병환을 비롯한 연씨 형제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1927년 3월 연미당 선생은 만 19세의 나이로 엄항섭과 결혼했다. 엄항섭은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한 인물로, 부친 연병환과 친분관계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미당·엄항섭 부부는 독립운동 세력 단결을 위해 힘썼는데, 1927년 11월 중국 관내지역 청년단체들과 함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결성에 참여했다. 1928년 9월에는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상해지부 결성에 따라 각각 청년동맹과 청년여자동맹에서 활약했다. 1930년 8월에는 한인여자청년동맹 창립에 참여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한 한인 독립운동가에 대한 검거와 수색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주도 인물이었던 남편 엄항섭이 먼저 피신하고, 연미당 선생과 임시정부 요인들도 가흥으로 이주했다. 상해를 떠난 엄항섭은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의 연락 임무를 맡고, 연미당 선생은 남편을 대신해 임시정부 요인들을 모시며 피신생활에 들어갔다.

연미당은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결성해 선전과 홍보활동에 주력하였다. 1940년대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자 여성들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고, 1943년 2월 23일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가 개최됐다. 연미당은 조직부 주임을 맡아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였는데, 방송을 통해 국내외 여성 동포들의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거나 광복군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연미당은 남편을 대신해 자녀들을 교육하고 양육한 실질적 가장이었고, 항일투쟁전선에 뛰어든 독립운동가였다. 정부는 독립을 위해 헌신한 연미당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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