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의 작품 '계산무진(시내와 산은 끝이 없다)' (제공: 간송미술문화재단)ⓒ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
장승업의 작품 '계산무진(시내와 산은 끝이 없다)' (제공: 간송미술문화재단)ⓒ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

‘조선 거장 장승업X취화선’ 展
中 그림, 재조화·변형·재구성
독창적인 그림세계 만들어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영화 ‘취화선’으로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장승업(1843~1897)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이다. ‘단원 회원만 원이냐, 나도 원이다’라고 말한 장승업은 조선왕조 회화사의 최후를 찬란하게 마감하면서 현대회화의 서막을 열어놓고 간 천재화가다. 하지만 그에 대한 관련 기록은 많지는 않다. 문화예술 방면의 자세한 기록과 보존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장승업의 호방한 필묵법과 정교한 묘사력은 단 하나의 작품만 보아도 그의 세계를 궁금케 만들 정도다. 

◆장승업, 그는 왜 천재로 불렸나

장승업은 중인가문으로 생각되는 대원(大元) 장씨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로 떠돌다가 한양에 거주했던 역관 이응헌의 집에 더부살이 하게 됐다. 추사 김정희의 제자였던 이상적의 사위인 이응헌의 집에는 중국에서 수집해 온 그림이 쌓여 있었다.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은 “장승업이 어느 날 그림을 곁눈질하다가 붓을 들고 따라 그리는 데 거의 똑같이 표현했다. 천재성을 발휘한 것”이라며 “그의 재주에 놀란 이응헌이 장승업에게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켰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장승업은 워낙 그림 솜씨가 뛰어나서 요즘 말로 도화서에 특별 채용됐다”라며 “하지만 고종이 있는 천하재일의 궁궐일지언정 얽매이기 싫어하는 성격상 구애받지 않으려고 스스로 그 자리를 포기했다”라고 말했다. 즉, 타고난 그림솜씨와 자유로운 생활이 장승업을 이해하는 두 가지 핵심 포인트다.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X취화선’ 전(展)과 관련해 열린 기자간담회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X취화선’ 전(展)과 관련해 열린 기자간담회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

◆일자무식이지만 다재다능

일자무식인 장승업은 자신의 이름조차 쓸 줄 몰랐다. 그러다 보니 그는 중국의 다양한 화보를 보고 그림을 배웠다. 탁 연구원은 “장승업이 중국 화보를 따라 그렸지만 단 한 점도 중국 것과 같은 그림이 없다”라며 “재조화, 재구성, 변형을 통해 장승업만의 그림 세계를 만들어 갔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장승업의 작품 안에 고스란히 담겼다. 먼저 그의 작품 ‘삼인문년(三老問年)’은 송나라 문인인 동파 소식이 지은 ‘동파지림’에 수록된 고사인데 세 노인이 서로 나이 자랑을 하는 이야기를 담아놓았다. 세 노인의 복장은 모두 화려하고 옷깃의 색상에 차이를 두는 등 변화를 주었다. 뒤에는 구멍 뚫린 기괴한 바위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가 가득한데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상징하는 내용으로 보인다.

작품 ‘귀거래도’는 동진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를 주제로 한 산수화다. 고향으로 낙향하며 지은 시인 ‘귀거래사’는 모든 무인과 학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이었다. 신선이 소나무 그늘에 앉아 사슴에게 신선 경전을 가르치는 ‘녹수선경’도 있다. 작품 ‘청강리어’에는 잉어 한 마리가 수초사이를 헤집으며 몸을 틀어 올리고 있다.

그 위로 송사리 때가 무리를 지어 헤엄진다. 잉어는 등용문 고사를 그린 것이고, 송사리는 어린 시절 타향살이 고생을 극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라서기를 기원하는 것을 담고 있다.

대개 조선시대 화원은 자신이 잘 그리는 그림이 있었는데, 장승업은 탁월한 솜씨로 모든 그림을 따라 그렸기 때문에 거의 모든 소재를 다 다뤘다. 산수, 인물, 신선, 화조, 기명절지까지 다양했다. 탁 연구원은 “장승업이 활동하던 시기는 조선의 기운이 거의 다 될 때”라며 “그의 자유로운 그림은 어지러운 시대 상황과 관계가 어느 정도 있을 듯 보인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장승업은 취명거사하는 별호를 가질 정도로 술과 여자가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고, 그에게 오직 예술의 영감을 북돋아 주는 것은 술뿐이었다. 그는 그림을 구하는 사람들의 사랑방과 술집을 전전하며 뜬구름같이 일생을 보내다 1897년에 생을 마쳤다. 하지만 아무도 장승업이 어디서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모른다.

춘남극노인 (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
춘남극노인 (제공:간송미술문화재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7.1

◆현대 동양화의 시조인 이유

장승업은 ‘현대 동양화의 시조’로 불리고 있다. 장승업의 그의 그림은 두 명의 제자인 소림 조석진(1853~1920)과 심전 안중식(1861~1919)으로 이어진다.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근간인 도화서는 갑오개혁(1894년) 이후 폐지됐다. 이로 인해 화원들은 하나둘 일자리를 잃게 됐고, 결국 이들 화원은 민간으로 진출하게 됐다. 이때 조석진과 안중식은 ‘서화미술회’와 ‘조선서화협회’를 조직해 생계를 유지했고 후진을 양성해나갔다.

탁 연구원은 “안중식의 수제자는 초대 미대학장이었다”며 “우리가 오늘날 장승업 그림을 현대 동양화의 시조라고 말하는 이유는 여기 있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이번 전시에는 조석진과 안중식의 그림도 함께 선보여 현대 한국동양화의 근원을 이해 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간송미술문화재단과 서울디자인재단이 마련한 ‘조선 최후의 거장 장승업X취화선’ 전(展)은 11월 30일까지 서울 중구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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