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규장각 내 전시된 일본과의 통상장정세칙체결 및 비준교환에 대한 국왕의 전권위임장. 1883년 6월 15일(양력 7월 18일)에 국왕이 독판교섭통상사무 민영목에게 일본과의 통상장정체결 및 비준교환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위임장이다. ⓒ천지일보(뉴스천지)

일본, 임오군란 빌미로 조선 내정 간섭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조선과 일본 간 불평등조약으로 알려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이 처음부터 불평등이 아니었으나 대원군이 임오군란을 일으켰을 때 일본 측이 자국의 교관 피살과 공사관 소실에 대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물어 압박을 가하면서 생겨났다는 주장이 있다. 아울러 강제병합의 결정적 원인은 러일전쟁 때문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27일 대한제국 국제학술대회에 참여한 이태진 서울대 교수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서 “처음부터 불평등 관계가 아니었다”며 “조선과 일본이 조약을 맺을 당시 ‘온전한’ 조약을 맺었다. 임오군란 후 일본은 ‘제물포조약(1882)’ ‘세칙에 관한 조약(1883)’ 그리고 갑신정변 후에는 ‘한성조약(1886)’ 등의 체결을 요구하면서 조선이 불리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임오군란을 빌미로 일본이 제시한 조약들은 비준서를 포함해 정식조약의 요건을 모두 갖췄다. 제물포조약과 한성조약 등은 일본이 큰 피해를 입은 것에 대한 사죄의 뜻을 담은 조선 국왕의 국서를 요구한 결과로 비준서를 대신했다.

이 교수는 “1880년대에는 오히려 일본이 조선에 요건충족을 강하게 요구했다”며 “한성조약 체결 때 조선 대표 김홍집이 위임장을 잊고 회담장에 오자 일본 대표는 위임장을 가져올 때까지 협상에 임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는 일본이 한반도에 대한 청국의 절대적 영향을 조금씩 밀어내는 외교 전략의 성과에 대한 법적 근거를 확실히 해 두기 위함이라고 풀이된다.

하지만 일본은 청국과 전쟁을 벌여 한반도에 있는 청의 영향을 제거하고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1894년 6월 초, 동학농민군 진압을 구실로 청나라와 일본은 자국의 군대를 조선에 동시 출병시켰다.

청군이 동학농민군의 활동지와 가까운 아산만에 진을 친 반면, 일본군 1개 여단 8000여의 병력은 인천을 거쳐 서울로 진입했다. 일본은 농민군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 조선의 내정개혁을 촉구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이 교수는 “명백한 내정 간섭인 동시에 주권 위협의 사태”라며 “군주와 정부는 강력히 항의했으나 일본은 요지부동이었다”고 말했다.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은 일본이 조선을 강탈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은 10년 전에 미수에 그친 조선의 보호국화를 목표로 최선발대를 인천을 통해 거쳐 서울로 보냈다. 서울에 진입한 1개 사단 병력은 주차군이란 이름으로 상주, 강제 조약을 지원했다.

이후 수차례 강제 조약이 이뤄지는 동안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문서를 일부 조작하거나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황제 서명을 위조하는 등 책략을 쓴 것으로 드러났다.

이 교수는 당시 이뤄졌던 조약들에 대해 “온전과 불법을 넘나든 자기모순의 조약”이라며 “일본은 한반도에 근거를 만들 때는 법적 요건을 다 갖추고 조선 국권을 탈취할 때는 국가원수 비준을 구하지 않거나 받지 못한 상태에서 체결을 기정사실화 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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