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그릇된 관행을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고 지내다보면 겉보기에는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이런 가운데 그 관행을 문제 삼고 나서면 처음에는 그것을 지키려는 저항이 무섭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소란도 곧 잦아들고 말 것이다. 언제나 이성보다는 시간이 전향자를 더 많이 만들어내는 법이다.” (토마스 페인의 ‘상식’ 서문)

미국 독립투쟁의 불씨를 댕긴 토마스 페인(T. Paine)은 ‘그릇된 관행’이 ‘시간’을 통해 ‘상식’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식민지 미국’을 통해 호소하듯 역설했다. 그러나 그 시간은 ‘자연적인 시간’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행동, 즉 ‘독립투쟁’이라는 피의 투쟁이 없었다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전까지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이 ‘새로운 상식’으로 전복되는 과정은 그만큼의 고통과 인내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페인의 ‘상식’은 낡고 병든 의식이나 관행에 대한 투쟁이며 이를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상식의 성격을 역설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이성’의 역할보다 ‘시간’의 의미를 더 강조한 것은 ‘이성에 대한 불신’보다 ‘역사에 대한 신뢰’가 더 컸기 때문이리라.
 

정치의 상식

이번 6.13지방선거는 홍준표 대표체제의 자유한국당에 대한 ‘국민적 응징’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완전히 무너져 내려 형체도 찾을 수 없는 궤멸(潰滅), 딱 그 말이 맞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는 답이 이미 나와 있다. 처음부터 다시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부 인사들은 안이하게도 ‘리모델링’ 얘기를 하고 있다. 몇 안 되는 기둥과 깨지지 않은 기왓장 그리고 안방의 온돌은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벽돌을 다시 세우고 지붕을 다시 얹고 집 안밖에 페인트칠을 하면 다시 쓸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폐허가 된 그 집의 재산권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 ‘새 집’이 들어서면 합류하지 못하고 쫓겨날 것을 우려하는 마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궤멸의 주역들이 집단적으로 소통이니 정풍이니 하며 쏟아내는 언행에는 실소가 나올 지경이다. 모두 상식 밖의 정치요, 정치적 탐욕에 다름 아니다.

이번 6.13지방선거에서 존재감조차 드러내지 못한 바른미래당의 처지도 예외가 아니다. 비록 자유한국당 응징의 유탄을 맞아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그 이후의 당 모습은 더 절망적이다. 무엇이 잘못됐으며 또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절박함이나 진정성이 보이질 않는다. 지금도 서로 ‘네 탓’ 하기에 바쁘다. 사실 바른미래당은 통합 과정보다 통합 이후의 행태가 더 문제였다. 마치 양쪽은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듯 그들은 ‘한 지붕 두 가족’이었다. 비전도 리더십도 동지애도 없었다. 지방선거 이후의 주도권이나 당권을 의식하며 ‘소 닭 보듯’ 서로가 서로를 지나쳤다. 그 와중에서도 당을 살려보겠다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선 안철수 전 대표의 결단이 오히려 눈물겹다. 이마저도 안 전 대표가 3등을 하자 온갖 비난과 책임론이 곳곳에서 불거지고 있다. 심지어 ‘정계은퇴론’까지 촉발시키고 있다. 상식의 정치가 아니라 ‘패륜의 정치’에 다름 아니다. 정작 누가 은퇴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 그 지긋지긋한 이념 싸움, 언제쯤 끝낼 것인가. ‘제3의 길’은 아무나 걷는 길이 아니다. 

이보다 더한 완승을 다시 꿈꾸기는 어려울 것이다. 민주당 완승은 ‘분노한 민심’이 폭발한 결과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촛불민심의 후반전 같은 선거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이어 이번에는 홍준표 전 대표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선거정치는 ‘응징’으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민주당 후보들은 이번에도 ‘꽃길’을 걸었던 셈이다.

그러나 중앙권력에 더해서 지방권력까지 장악한 청와대와 민주당의 최근 언행까지 지방선거 압승으로 묻어 둘 수는 없는 일이다. 남북관계에 잠시 가려졌던 민생문제가 현안으로 급부상하면서 정부와 여당의 무능을 질타하는 민심이 거세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우선 정책으로 강조했던 일자리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거의 ‘재앙’ 수준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최저임금 정책에 대한 오판으로 서민경제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여기에 최근의 증시불안까지 겹쳐 대규모 자금이 이탈하고 가계부채마저 위기감이 더 높아지면서 자칫 경제기반마저 붕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애써 대수롭지 않다는 분위기이다. 경제 참모들을 일부 바꾸긴 했지만 ‘경질’은 아니라는 메시지에 힘을 싣고 있다. 그러니 정책기조를 바꿀 이유도 없다는 뜻이다. 매번 추경예산 타령만 하는 건 아닐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드루킹 특검’이 시작되자마자 그 대상으로 거론되던 인사를 핵심 비서관 자리로 재배치시켰다.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의 강수를 둔 것이다. 민생 및 노동정책과 관련해서도 당·정·청 불협화음이 불거지고 있지만 오히려 ‘정상적’이라는 항변이다. 피눈물 나는 것은 가난한 국민들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당은 이번 기회에 국회 법사위원장까지 차지하겠다며 후반기 원 구성을 압박하고 있다. 물론 협상용으로 보고 싶지만 진심이라면 ‘오만’에 다름 아니다. 상식 밖의 정치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2년차, 여전히 ‘상식의 정치’는 멀리 있고 오만과 무능, 탐욕과 몰염치, 저질과 패륜의 언행들이 넘쳐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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