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쓸쓸한 물결이 이는 강가에
그는 서 있었다. 상념에 잠겨…

그는 생각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스웨덴을 위협하리라. 
오만한 이웃나라를 혼내주기 위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리라.

- 푸슈킨, ‘청동기사’(1833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데카브리스트 광장에서 ‘청동기마상’을 보았다. 표트르 대제의 한 손은 네바 강 건너편을 가리키고 있고, 말은 뒷발로 뱀을 짓밟은 채 앞발 두 개를 치켜들고 있다. 뱀은 개혁 거부 세력들을 의미한다. 

600톤이나 되는 반석에는 “표트르 1세에게 에카테리나 2세로부터 1782”라고 새겨져 있다. 남편 표트르 3세를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독일 출신 에카테리나 여제가 표트르 1세에게 헌정한 것이다.  

표트르 대제(1672∼1725)는 1712년에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수도를 옮기고 1721년에 스웨덴을 항복시켜 발트해 연안을 차지한 차르이다.  

1695년에 표트르는 오스만튀르크와 전쟁에 포병 장교로 종군했다. 러시아 군은 대규모 병력으로 아조프 요새를 공격했지만 요새는 끄덕하지 않았고 오히려 러시아 군만 피해를 입고 퇴각했다. 

오스만튀르크 군이 선전했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은 튀르크 해군이 흑해를 통해서 풍부한 군수물자는 물론 보충 병력까지 수송했기 때문이었다. 해군을 보유하지 못한 러시아 군으로서는 이 광경을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표트르는 이 전투를 통해서 해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696년에 표트르와 공동 차르였던 이복형 이반이 사망했다. 명실상부한  통치자가 된 그의 첫 과업은 아조프 요새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그는 우격다짐으로 30척의 전함을 만들었다. 표트르는 다시 아조프 요새를 공격하면서 이 전함들을 이용해 튀르크 해군에 대항했다. 결국 러시아 함대는 튀르크의 수송선단 저지에 성공했고, 표트르는 1696년 7월에 아조프 요새를 함락시켰다.
1697년 3월, 포병 하사관 표트르 미하일로프 신분으로 위장한 표트르는 250명으로 구성된 ‘사절단’을 거느리고 유럽 시찰에 나섰다. 사절단은 라트비아, 프로이센, 네덜란드, 영국, 오스트리아 등 여러 나라를 순방했다. 그는 라트비아에선 축성술을 배우고, 프로이센에서는 폭탄 제조법을 배웠으며, 네덜란드 사르담에서는 조선소에서 목수로 일했고 암스테르담에서는 군함제조에 참여했다. 또 영국에서는 해양군사학을 공부하고 그리니치 천문대도 방문했고 뉴턴을 만나기도 했다. 다음에는 오스트리아를 찾았다. 빈은 합스부르크 왕국의 중심이었다. 

빈에서 이탈리아로 떠나려는 즈음인 1698년 7월에 표트르는 친위대  스트렐치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급보를 받았다. 그는 급거 귀국길에 올랐다. 다행히도 반란은 쉽게 진압됐으나 모스크바로 돌아온 표트르는 반란 가담자 1200명을 모두 처형하고 시체들을 한동안 매달아두었다. 

저항세력을 제거한 표트르는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먼저 백성들에게 턱수염부터 자르도록 했고 불이행하면 ‘수염세’를 부과했다. 복장도 거추장스러운 러시아 복장에서 간편한 양복으로 바꾸었다.    

군대 개혁도 단행했다. 1700년에 징병제를 실시했고 사관학교를 세웠으며, 대포·군함을 생산해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강력한 개혁 군주 표트르 대제! 그는 유럽의 근대화를 받아들여 러시아의 부국강병에 총 매진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