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과 태항아리’ 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다. 사진은 전시실 안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8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과 태항아리’ 특별전이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다. 사진은 전시실 안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8

한중연·고궁박물관 특별展

일반 풍수지리법과는 달리
볼록한 산봉우리 정상 골라
발견된 길지 누적해 놓기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태가 좋은 땅을 만나면 복을 받을 것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는 자손, 특히 아들의 탄생은 매우 중요했다. 가계를 계승하는 의미를 넘어 왕실의 영속과 국가의 안정을 보장하는 경사였다. 특히 생명을 중시했기에 어머니와 연결된 생명줄을 소중히 여겼고, 태항아리를 만들어 ‘태(胎)’를 보관했다. 그런데 조선왕실의 자손의 태이기에 아무 땅에나 묻을 수 없었다. 이에 출산 후 나오게 되는 태반을 길지(吉地)에 봉장했는데 이를 ‘안태’라고 했다.

◆‘길지’ 찾아 삼만리

27일 이욱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의 ‘조선시대 왕실의 안태와 가봉 의식’ 자료에 따르면, 안태라는 말에서 좋은 땅이란 ‘육안태(六安胎)’에서 말하는 것처럼 ‘땅이 반듯하고 우뚝 솟아 위로 공중을 받치는 듯한’이라는 뜻을 담은 곳이다. 안태서(安胎書)에서는 ‘태실은 마땅히 높고 정결한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높은 봉우리를 선호하는 태실의 택지술은 일반 풍수법과는 달랐다. 사람이 사는 거주지나 시신을 안장하는 묘지에 적합한 길지는 주산의 혈맥과 함께 좋은 기운이 쉽게 빠져나가지 않게 좌우에 산을 감싸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태실은 주변의 산세보다 마치 주발을 엎어놓은 듯 볼록 튀어나온 산봉우리의 정상을 길지로 택했다. 평지에 둥근 봉우리를 택하기도 했다. 즉, 중요한 것은 ‘높음’이었다.

길지를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출산 당일에 맞춰 길지를 찾다보니 어려움은 더 컸다. 이에 나라에서는 태실에 적합한 길지를 미리 조사해 정보를 누적하고 있었다.

전시실 안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8
전시실 안 모습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8

1399년(정종1)에 정종은 민제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에 보내 안태할 땅을 직접 살펴보게 했다. 1401년(태종1)에는 태종이 하윤을 증고사(태를 묻을 곳을 찾기 위해 파견하는 임시 벼슬)로 삼아 지방에 보냈다. 이를 통해 찾은 길지는 3등급으로 나눠 관상감(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 등에 관한 일을 담당한 기관)에서 문서로 보관했다. 왕위를 계승할 원자와 원손의 태실은 길지 중에서도 1등지에 태실을 만들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길지를 기록한 장부가 사라졌고, 이후 나라에서는 증고사가 아닌 지방관으로 길지를 찾아보도록 지시했다.

◆왕위 오르면 태실에 석물 추가

태실의 주인이 왕위에 오르면 ‘가봉’이라는 절차를 통해 태실에 석물을 추가로 설치했다. 이에 대한 의궤를 ‘석난간조배의궤’라고 한다. ‘순조태봉도’에는 1806년(순조 6) 순조의 태실에 석물을 단장한 뒤 주변의 지세를 그려 놓았다. 태실의 위치는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사내리 속리산 안쪽이다. 태실은 조성할 때와 이후 가봉할 때 모두 땅을 주관하는 신들에게 태의 주인을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하는 제사를 지냈다. 태실의 석물이 파손되면 일정한 법식에 따라 개수했고 이는 후대에도 이어졌다.

왕손의 태를 묻은 지역은 백성들이 거주하거나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태실을 조성하고 수호하기 위해 지역 백성들을 동원했기에 태실 조성은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이에 영조 때에는 이를 개선할 방법을 찾으려고도 했다.

태항아리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8
태항아리 (제공: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8

◆“다 같은 태항아리 아냐”

태항아리라도 다 같지는 않았다. 생명을 품은 태항아리는 시대마다 특색이 있었다. 먼저 조선 태조부터 태종까지 세 왕의 태항아리는 도기였다. 태항아리는 세종 이후부터 성종 이전까지 각 지방에서 세금으로 징수된 분청사기와 도기 등이 함께 사용되다가 점차 백자로 변화됐다. 성종 대 이후 항아리의 몸체 상단에 네 개의 고리가 붙어있고, 연꽃봉오리 모양 손잡이가 부착된 뚜껑이 있는 백자 내·외항아리가 만들어졌다.

태항아리가 백자로 완전히 바뀐 것은 경기도 광주에 왕실 전용 도자기를 제작한 관요(1460년대 중후반)가 사옹원(조선시대 궁중의 음식을 맡아본 관청)의 분원으로 설치되면서다. 백자 태항아리는 일종의 의례용기였기에 기본적인 형태가 크게 변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후기까지 시기에 따라 약간의 기형 변화를 보였다. 그러다 1884년경 사옹원의 분원이 해체되고 왕조가 저물어 가면서 태항아리도 전통적인 위상을 잃게 됐다.

한편 이 같은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과 태항아리’를 조명해 보는 특별전은 서울 국립고궁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27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다. 이번 전시는 국립고궁박물관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서 함께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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