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문화칼럼] ‘아일라’의 비극 다시 없기를
[이재준 문화칼럼] ‘아일라’의 비극 다시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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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아일라’는 터키어로 달(月)이라는 뜻이다. 달은 지금도 터키인들의 희망이고 신앙이다. 왜 이들은 달을 숭배하고 가슴속에 넣고 살았을까. 이들의 본래 조상은 동쪽에서 살던 돌궐이었다. 터키를 투르크라고 부르는 것도 돌궐에서 기인한다는 학자들이 많다. 흉노 혹은 훈족의 후예라는 학설도 있다. 

돌궐은 우리 역사와 밀접하다. 고구려와는 한때 동맹을 했으며 한족과 대항했다. 이 때 교류가 많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재미있게도 터키어와 한국어는 비슷한 데가 많다. 아버지 호칭 빠빠는 터키에서도 ‘바바’다. 물을 ‘수’, 접시는 ‘텝시’, 싸우다는 ‘싸왔쓰’, 호미는 ‘호미’로 부른다. 

용감한 투르크 전사들은 초승달을 상징흉장으로 삼았다. 14세기 초 투르크 전사들이 유럽을 짓밟았을 때 초승달이 얼마나 두려움의 대상이 됐는지 지금도 오스트리아에 가면 공포가 일상에 스며있다. 건물 창문에 초승달 모양의 부적을 붙이고 같은 모양의 식빵도 있다. 식빵을 먹으면서 투르크에 대한 증오를 씹는다는 것이다.

신라 문무왕비에는 김씨의 근원이 흉노에서 비롯됐음이 나타난다. 왕은 자신이 흉노의 왕자인 김일제(金日磾, BC 134~86)의 후손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김일제는 기원전 한 무제(漢 武帝) 때 포로로 잡혀 산동(山東)에서 귀족으로 살았다. 그런데 후손들이 나중에 역모에 연루돼 한나라를 탈출, 신라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이다. 신라인들도 터키인들처럼 달을 숭배했다. 가배(嘉俳, 추석)도 신라인들이 만든 축일이었다. 신라왕들은 반달 같은 모양의 토성을 쌓고 이곳에 장엄한 궁전을 짓고 살았다.

터키는 옛날부터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고 불렀다. 6.25 전쟁 때는 1만 4천명의 병사들을 한국에 파병했다. 이는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 규모의 병력이다. 전쟁 중에 사망한 터키군 전사자는 765명이고, 부상자는 2147명이었다. 형제의 나라를 지키다 많은 젊은이들이 피를 흘렸다. 

요즈음 극장가에서 터키군과 한국전쟁 소녀 이야기를 다룬 ‘아일라’가 개봉돼 화제를 모으고 있다. 실화를 소재로 만든 이 영화는 이미 터키에서 방영돼 5백만명의 관객을 모았다. 형제의 나라 소재를 다룬 것이어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은 것인가.  

아일라는 부모를 잃고 떠돌던 소녀의 이름으로 터키군 병사가 지어 준 것이다. 터키군인 슐레이만은 전장 현장에서 5살 소녀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부대로 데려온다. 그는 소녀에게 터키어로 ‘달’이라는 뜻인 ‘아일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일라 역시 슐레이만을 ‘바바’라고 불렀다. 아일라는 포탄이 터지는 전장터에서 재롱으로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터키 병사들은 아일라를 ‘기적의 아이’라고 불렀다. 슐레이만은 후속 부대와 교대하면서 아일라를 가방에 숨겨 배에 오르려고 했다. 그러나 도중에 발각돼 아일라와 헤어져야만 했다. 슐레이만은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터키로 떠났으며 소녀는 고아원에 맡겨진다. 그리고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두 사람은 기적적으로 만났다. 2010년 모 방송국에서 이들의 얘길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것을 계기로 감동의 재회를 한 것이다. 오늘이 바로 6.25 발발 68주년. 아직도 생존해 있는 수많은 아일라들의 가슴속에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다. 이산의 아픔과 가족을 잃은 이들의 한은 치유되지 않았다. 

우리는 참담했던 동족상잔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남북화해 시대라고 하여 서둘러 무장해제를 해서도 안 된다. 국가 안보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 그래야 제2의 6.25 같은 비극을 막을 수 있다. 전쟁을 종식하기 위해 지구촌을 누비는 열정적인 하늘문화세계평화광복(HWPL)의 평화운동이 더욱 중요하게 와 닿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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