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피해자의 삶 영화서 보듯 녹록지 않아

일본 패전 이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어

[천지일보=이혜림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변호인단이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을 만큼 의미 있는 결과를 이뤄냈음에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관부 재판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 ‘허스토리’. 영화에는 사회적 편견 탓에 당당하게 피해자라 말하지 못했던 할머니들의 사연이 자세히 담겨 있다.

제작진은 관부 재판이라는 역사적 실화를 소재로 하는 작품인 만큼 상세한 과정과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영화에 담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실제 재판 원고단을 지원했던 후쿠야마 연락회는 6년간 재판 과정을 담은 소식지를 발행하고 일본 내에 배포해 재판의 정당성과 지지를 호소했다. 김문숙 단장은 재판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를 기록한 ‘관부 재판의 기록’을 발간했다. 제작진은 일어로 된 소식지를 확보해 번역했으며, 관부 재판 기록물이나 인터뷰 등을 통해 진실을 따라갔다.

‘나라 잃은 슬픔’ 부녀자 강제 이송 대기(1940년). 한국 남성들은 징병에 동원돼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없었고, 일본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강제로 다른 지역으로 이송했다. 일본 고등경찰관 감시 아래 북간도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부녀자들만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나라 잃은 슬픔을 엿볼 수 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나라 잃은 슬픔’ 부녀자 강제 이송 대기(1940년). 한국 남성들은 징병에 동원돼 가족과 함께 떠날 수 없었고, 일본은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강제로 다른 지역으로 이송했다. 일본 고등경찰관 감시 아래 북간도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 부녀자들만 역에서 대기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 나라 잃은 슬픔을 엿볼 수 있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

 

할머니들의 사연은 법정 신에서 들을 수 있다. 기존의 일본군 ‘위안부’ 관련 영화에서는 어린 피해자들이 등장해 당시의 상황을 재연했다. 하지만 ‘허스토리’는 잔인하거나 폭력적이고 보기 힘든 장면이 없다.

영화에서는 독립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그 자리에 남아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법정에 선 할머니를 통해 전한다. 할머니들은 입술을 앙다물고 감정을 억누른 채 말하기 어려운 자신의 한 맺힌 삶을 일본 재판관에게 설명한다.

특히 배우 김해숙이 증언하는 법정 신에서 보여주는 진심을 담은 연기는 할머니들의 아픔이 잘 드러난다. 김해숙은 피해자들에게 최대한 누가 되지 않도록 모든 감정을 억눌렀다가 표출해 실제로 심적 괴로움과 몸살을 앓았다는 후문이다.

[천지일보-일제침략사] 강제이송 된 위안부들(1943년). 밤늦게 끌려온 여성들은 모두 할 말을 잊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훈시를 듣고 있는 장면이다. 방바닥에 있는 원표시는 한국여성용 코고무신과 일본 나막신이 함께 보인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DB
[천지일보-일제침략사] 강제이송 된 위안부들(1943년). 밤늦게 끌려온 여성들은 모두 할 말을 잊고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훈시를 듣고 있는 장면이다. 방바닥에 있는 원표시는 한국여성용 코고무신과 일본 나막신이 함께 보인다. (사진제공: 정성길 명예관장) ⓒ천지일보(뉴스천지)DB

 

◆일본의 패전 이후 고단했던 할머니들

영화에서처럼 할머니들의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일본이 패전하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철저하게 버림받았다. 일본군은 퇴각하면서 이들을 모아 죽이기도 했다. 살아남은 피해자들은 잠시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집단으로 귀국선을 타거나, 혼자 실로 숱한 어려움을 헤치면서 고향으로 갔다.

그러나 돌아오는 방법을 몰랐거나 알았어도 더럽혀진 몸으로 돈도 한푼 없이 돌아갈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한 경우도 적지 않다. 또 귀국 도중 연합군의 폭격으로 배가 파산선돼 집단으로 수장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도 있다.

찢질 대로 찢진 몸과 마음은 1950년 한국전쟁을 치르며 한번 더 상처를 받았다. 피해자들은 가족 앞에 떳떳이 나서기 어려웠고, 주위 사람 중 누가 알기라도 할까 봐 늘 숨어지냈다. 또 생계를 위해 농사를 짓거나 품팔이를 하고, 행상 등 보잘것없는 장사에 손을 대드는 등 길거리에 나서야 했다.

어쩌다가 들어온 혼처는 대부분 상대방이 재혼이었고, 전처 자식을 맡아 키우는 일이 허다했다. 자식을 낳기도 했으나 키우기 쉽지 않았다. 이 같은 이유로 평생 독신으로 생활한 사람이 대다수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0·가운데 휠체어)가 세계여성의 날인 8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본부 앞에서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유네스코는 최근 한국과 일본 등 세계시민사회단체들이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보류한 바 있다. 이 할머니의 프랑스행에 동행한 양기대 광명시장(왼쪽)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오른쪽)도 함께 손 팻말을 들고 시위에 동참했다. (출처: 연합뉴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0·가운데 휠체어)가 세계여성의 날인 8일(현지시간) 오후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본부 앞에서 일본의 사죄와 법적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했다. 유네스코는 최근 한국과 일본 등 세계시민사회단체들이 신청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보류한 바 있다. 이 할머니의 프랑스행에 동행한 양기대 광명시장(왼쪽)과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안신권 소장(오른쪽)도 함께 손 팻말을 들고 시위에 동참했다. (출처: 연합뉴스)

 

◆명예·인권 회복 위해 길거리로 나서

피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다른 보통 여성들처럼 혼인하고 아이 낳고 그저 그렇게 살아봤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극히 평범하게 사는 것이 이들의 소박한 꿈이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갈 순 없지만 할머니들은 일본 정부와 세상을 향해 명예와 인권 회복을 외치고 있다.

1988년 ‘여성과 관광문화 세미나’에서 윤정옥 교수가 처음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세상에 드러낸 후 여성 단체들이 결성됐고, 이들은 일본 정부를 향해 문제 제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관여 사실을 부인했고 이에 분노한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기자 회견을 통해 자신이 바로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임을 공개적으로 증언했다.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관부 재판의 시발점이 됐다. 할머니들은 당당한 평화운동가로, 여성 운동가로서 자신과 같은 일을 겪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3.1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독도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사진은  서울  중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3월 1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열린 3.1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문제와 독도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사진은 서울 중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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