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자유한국당이 이번 6.13 지방선거 참패에 대한 혁신안을 놓고 연일 논란을 벌이고 있다. 겉으로는 절차적 문제나 당내 의견수렴 등을 거론하고 있지만 실상은 당내 기득권 세력의 집단적 저항에 다름 아니다. 민심을 수용해 당을 근본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김성태 원내대표, 이에 대항에 무슨 권한으로 당 혁신을 독점하느냐며 맞서는 대립구도이다. 이것은 당의 진로에 대한 논쟁이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건 생존의 문제에 가깝다.

김성태 원내대표는 당초 ‘자유한국당 해체’라는 핵폭탄급 처방전을 내놓았다. 실제로 이뤄진다면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러나 점점 꼬리를 내렸다. ‘중앙당 해체’로 표현을 바꾸더니 급기야 중앙당 ‘구조조정’ 또는 ‘슬림화’ 정도로 귀결됐다. 당내 반발의 강도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예상대로 홍준표 대표는 물러났다. ‘친박 좌장’으로 불리던 서청원 의원은 탈당했다. 초선 의원들 몇몇은 불출마 각오까지 하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당내 심각한 기류가 읽히는 대목이긴 하지만 국민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제로 베이스’에서 다시 ‘새 건물’을 지어라 했더니 기껏 ‘리모델링 공사’냐며 더 큰 비판이 쏟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보수당, 가혹했지만 과감했다

정당 역사가 가장 긴 나라 영국, 이념과 가치를 중심으로 사실상 양당제를 주도했던 영국정치도 보수당과 노동당의 부침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인기가 좋을 때는 안정된 국정운영과 국민의 이익을 앞세웠으며 위기 때는 과감하게 ‘낡은 껍질’을 걷어내고 상처받은 국민 속으로 다가갔다. 이 과정에서 무수한 인적 쇄신이 수시로 이뤄졌으며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배신과 음모도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위기 때는 상대 정당의 가치와 정책까지 받아들이는 ‘굴욕 아닌 굴욕 같은’ 유연성도 발휘했다.

노동당 혁신의 아이콘인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로의 접근에 다름 아니었다. 1990년대 후반 보수당과 각을 세웠던 기존 노동당의 좌표를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셈이다. 사회민주주의 대신 보수주의 가치를 따라잡기에 바빴다. 그에 상응하는 인적쇄신은 불가피한 조치였다. 구태를 깨는 작업은 버거웠지만 그 결과 ‘보수당 천하’를 끝내고 노동당 전성시대를 열 수 있었다. 당시 보수당은 무려 165년 만의 참패를 면치 못했다. 당시 블레어 총리는 41세에 불과했다.  

보수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블레어의 등장으로 위기에 빠졌던 보수당은 2005년 기존의 ‘낡은 보수주의’의 틀을 깨고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새로운 깃발을 든 캐머런을 당수로 선출했다. 캐머런은 사회적 약자를 끌어안는 ‘따뜻한 보수’를 천명하며 시장경제에서의 ‘분배 가치’를 강조했다. 기존의 보수당이 아니라 당시 집권당인 노동당에 더 가까운 방향이었다. 그리고 인적쇄신은 더 가혹했다. 당시 캐머런은 39세에 불과했다. 인적쇄신과 정강정책 혁신을 담보한 보수당은 3년 뒤인 2008년 5월 노동당 정권의 중간평가 성격을 띤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다른 보수정당인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해 2010년 5월 6일 총선에서 13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루어냈다. 캐머런은 44세의 나이에 총리로 취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역대 선거에서 가장 참담한 패배를 기록한 자유한국당은 지금 어떤 상황일까. 우선 인적쇄신부터 길이 막혀버렸다. 새로운 지도자는커녕 구태 인사를 퇴출시키는 작업도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런 마당에 일부 구태들의 탈당이나 불출마 선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보수정당의 역사상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인적쇄신을 이뤄내지 못했을 뿐더러 그 결과 정치적 기득권세력이 켜켜이 쌓여있는 자유한국당, 이번엔들 뭐가 달라지겠는가라는 조소와 냉소가 가득하지만 당내 분위기는 여전히 ‘보여주기식’으로 가는 듯하다. 불출마 선언이 아니라 정계은퇴 선언이 줄줄이 나와도 시원치 않다. 그럼에도 중앙당 슬림화나 당명 변경을 모색한다면 오판인지 아니면 오만인지 묻고 싶을 뿐이다. 게다가 제1야당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도 보이질 않는다. 이래저래 이대로는 희망보다 ‘절망’이 더 커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한국당의 마지막 승부수는 의외로 간명하다. 당의 인적쇄신과 ‘새로운 보수노선’ 채택 그리고 강호의 인재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는 방식은 당 안팎의 총의를 통해 자유한국당을 전격적으로 ‘해체’하는 방법이다. 우리 ‘정당법’ 45조 1항은 대의기관의 결의를 통한 ‘정당 해산’을 규정하고 있다. 이 방식대로 정당 해산을 결정하고 뜻을 함께하는 당원과 인사들을 다시 규합해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의 인적쇄신은 본질이며 새로운 보수주의의 가치를 정립하는 것은 성찰이다.

당 해체 이후의 신당 창당에 합류하지 못한 탈락 인사들은 그들의 정당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극우’ 수준의 정당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신당은 자연스럽게 개혁적 보수, 캐머런의 ‘진보적 보수주의’라는 ‘신보수 노선’을 재정립하기가 용이하다. 인적쇄신과 정강정책의 진화를 단박에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간명한 방식인 셈이다. 그 후 외연을 중도 쪽으로 확대할 수 있다면 바른미래당과 만나는 지점도 찾을 수 있는 일이다. 어쩌면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다시 ‘빅텐트’를 치는 날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정치는 가능성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던져야 할 때는 던질 줄도 알아야 한다. 자유한국당, 지금은 자신을 ‘통째로’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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