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의 생가ⓒ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윤봉길 의사의 생가 ‘광현당(光顯堂)’.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문화현장] 탄신 110주년 복원된 윤봉길 의사 생가 가보니
 

‘장부출가생불환’ 글 쓰고 망명

조국 광복 초석된 ‘상하이’ 의거

정부, 1974년 생가 중수했지만

‘정자’ 없고 ‘돈 축사’도 철거 돼

바로 잡아 민족정신 바로세워야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혼과 뜻이 남아 있는 걸까. 윤 의사 탄신 110주년 하루 전날인 20일 찾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위치한 ‘저한당(狙韓堂)’은 차분하고 담담한 기온이 맴돌았다. 이곳은 윤 의사가 4살 때부터 중국으로 망명했던 1930년까지 살던 곳으로, 윤 의사의 꿈과 뜻을 키운 곳이다. 건저 낼 ‘저(狙)’, 한나라 ‘한(韓)’이라는 한자에서 짐작할 수 있듯 ‘어려운 한국을 건져낼 집’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민족정신을 일깨우도록 발판을 마련해 나간 곳이 바로 저한당이다.

윤 의사의 생가인 ‘광현당(光顯堂)’도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이곳에서 태어난 그는 4세까지 지내다 저한당에서 생활했다. 1974년 중수된 생가는 초가지붕에 옛 정취를 가득 품고 있었다. 생가는 사방으로 냇물이 둘려 있는 배 모양의 ‘도중도(島中島)’에 있었다. 이는 ‘한반도 가운데 섬’으로, 일본의 발길이 닿지 않는 다는 뜻을 담고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 내에 있는 충의사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 내에 있는 충의사 모습.ⓒ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저한당과 광현당이 있는 이곳은 ‘매헌 윤봉길 의사 사적지’다. 윤 의사의 구국 의지와 민족혼이 서려 있는 사적지는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29호로 지정됐으며, 사당과 윤봉길의사기념관도 함께 조성돼 있었다.

독립운동가하면 이름을 빠뜨릴 수 없는 윤 의사. 그의 업적과 일대기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알려졌지만, 진짜 윤 의사의 삶에 대한 이해는 이곳 유적지를 둘러본 후부터였다.  

윤용 매헌윤봉길의사숭모회 회장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 충의사에서 윤봉길 의사의 나라에 겨레를 위해 몸바친 충의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윤용 매헌윤봉길의사숭모회 회장이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 충의사에서 윤봉길 의사의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몸바친 충의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윤봉길의 생애

윤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도중도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윤황, 어머니는 김원상이다. 윤 의사는 10세 되던 해인 1918년에는 덕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다음 해인 1919년 3.1만세운동이 일어났고 윤 의사는 다니던 학교를 자퇴했다.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塾)’의 매곡 성주록 선생에게 ‘사서삼경’ 등 한학을 배웠다. 1922년에 배용순과 결혼했고, 1926년 서숙생활을 마친 후 독학으로 국사와 신문학을 공부했다.

이 무렵 현실의 산 체험을 통해 농촌개혁에 눈을 떠갔고, 오치서숙 동학들과 첫 시도로 문맹퇴치운동을 생각하고 사랑방에 야학을 개설했다. 1928년에는 중산운동·구매조합조직·토산품애용·부업장려·생활개선을 통해 마을을 부흥시키기 위한 농민회관인 부흥원을 건립했다. 1929년 상부상조를 목표로 한 위친계(爲親契)를 조직했으며, 4월 23일 자작자급으로 힘을 길러 갱생하자는 취지로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고 회장에 추대됐다.

같은 해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윤 의사는 민족운동에 대한 방향전환을 모색하다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장부가 집을 나서면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윤 의사는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기념행사를 벌이던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물통으로 위장한 폭탄을 던져 축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힌 그는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25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이 거사는 임시정부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지원을 받아 항일운동을 활발하게 이어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해방 이후 윤 의사의 유해가 발굴돼 서울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됐다.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윤봉길 의사와 김구 선생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잘못 복원된 생가 바로 잡아야

정부는 이 같은 윤 의사의 업적을 높이 평가해 지난 1974년 생가인 광현당과 저한당을 보수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저한당 앞의 ‘돈 축사’가 철거됐다. 윤 의사의 수내 정신이 담긴 곳이 현재는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 셈이다.

이에 대해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의 친조카 윤주 매헌윤봉길의사숭모회 상임부회장은 “윤 의사는 농민운동을 펼칠 때 돈이 없어 돼지를 살 수 없는 농민에게 돼지를 자비로 사주고 기르게 했다”며 “새끼를 낳으면 그 절반은 기른 농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은 또 다른 농민에게 한 마리씩 주는 수내제도를 실시해 농민의 경제적 자립을 도모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매헌의 수내정신 상징물인 ‘돈 축사’를 즉시 복원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사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있는 윤봉길 의사 동상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윤 의사가 심신을 수양하고 농민계몽을 통한 구국을 구상한 정자인 ‘모정’ 복원의 목소리도 컸다. 윤 상임부회장은 “윤 의사는 생가 앞에 모정이라는 정자를 건립하고 이곳에서 농민운동·국권회복운동을 구상했다”라며 “모정에서 구상한 윤 의사의 계획 등 모든 뜻은 나중에 상해의거로 이뤄지기 때문에 모정은 상해의거의 근간이다”라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윤 의사의 ‘어머니 기념비 건립’에 대한 다짐의 목소리도 나왔다. 윤 의사의 위엄 뒤에는 어머니 김원상 여사가 있었는데, 김원상 여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덕산공립보통학교 2학년생인 윤 의사를 자퇴시키고 일제식민교육을 배격했다. 또한 윤 의사의 농민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윤용 매헌윤봉길의사숭모회 회장은 “상해 의거 2달 전 보낸 편지에서 ‘상해사변은 확전될 것 같다. 이대로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내용을 보고 김원상 여사는 ‘집은 걱정마라, 너의 길을 가라’고 회신했다”라며 “우리는 김원상 여사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기념비 건립을 추진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의 어록탑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윤봉길의사기념관에 세워진 윤봉길 의사의 어록탑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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