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 선생 영정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이항복 선생 영정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6.25 백사 이항복 선생 400주기
 

선조 도와 풍전등화 조선 구해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 쏟아
 

충의 주장하다 북청으로 유배

백성들의 존경 한 몸에 받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6월 25일(음력 5월 12일)은 조선 선조 때 명신이었던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1556∼1618) 선생의 400주기가 되는 날이다. 백사는 누구이며 국가를 위한 공은 무엇일까. 그는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5번이나 병조판서에 오를 만큼 선조의 신임을 받았으며 전후에는 좌의정과 영의정을 맡으면서 민심수습과 복구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공로는 선조를 끝까지 호종하며 명나라 원군을 얻어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한 것이다. 만약 명군의 지원을 받지 않았다면 조선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백사는 친구인 이덕형과 적극적으로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하는 데 앞장섰다. 첫 원군은 싸움다운 싸움도 못 하고 패전했다. 2차 원군은 이여송이 거느린 4만명 이상의 군사들이었다. 명나라 원군의 접빈사가 된 백사는 오만한 이여송의 마음을 돌리는 데 성공했으며, 조선 연합군과 더불어 평양성 탈환에 성공했다.

평양성 격전은 임진전쟁의 전황을 바꾸는 전환점이었다. 일본군은 연이어 퇴각하고 결국 수도 한양마저 버리고 후퇴했다. 선조는 다시 종묘사직이 있는 한양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평양성 탈환도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평양성 탈환도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임진전쟁 명 원군의 위기 타결

임진왜란 중 가장 큰 위기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이었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조선에 와 있던 양호(楊鎬) 장군과 갈등 하면서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라고 황제에게 허위 보고 했다.

명나라 군이 회군한다면 조선은 일본군을 쫓아낼 수 없었다. 선조는 덕망이 있는 백사를 정사(正使)로 삼아 연경에 파견한다. 당시 부사는 공조참판인 이정구(月沙 李廷龜)였다. 이때 백사는 일본에서 보낸 여러 가지 협박 문서를 챙겨서 황제 앞에서 무고임을 역설했다. 증빙 문서를 확인한 명나라 황제는 정응태의 무고임을 확인하고 더 많은 이여송(李如松)의 참전을 명했다.

이여송이 평양성을 공격하기 전 백사는 반드시 필요할 것이라고 하여 지도를 건넸다는 일화가 전한다. 뜻밖에 평양성을 그린 지도를 받은 이여송은 백사의 지혜에 탄복했다고 한다.

◆병조판서 다섯 번, 각종 시책 건의

백사는 이덕형과 교대로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이 시기 백사는 임금에게 각종 계(啓)를 올렸다. 화약의 제조, 산성의 수축, 불랑기(대포)의 제조 등 현안이었다. 전운이 감도는 변방에서 백사는 낭관들이 노래하고 북을 치는 모습을 듣고는 이들을 크게 책망하기도 했다.
 

時危秋興己無多 때가 위태로워서 추흥이 많지 않은데

不分簫笙咽晩坡 퉁소 소리인지 생황소리인지 저문 들판을 진동하네

遙想官軍守長白 생각건대 관군들은 장백산을 지키고 있는데

諸公何意只酣歌 제공은 무슨 뜻으로 취하여 노래만 하는가

(백사집 권1)
 

백사는 선조를 시위하는 근왕병 모집과 정비에 전력을 다하고 올바른 소리로 선조를 보필했다. 이 공으로 우의정이 됐으며, 왜란이 끝난 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으로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때 백사는 임금에게 자신을 일등에서 제외해 달라는 주청을 여러 번 올리는 겸손함을 보이기도 했다.

백사는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1600년 영의정에 올랐다.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牛溪, 成渾)을 무고하자 무죄를 변호하다가 영의정 자리를 내놓았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직함을 지니기도 했다.

백사 이항복 선생 신도비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백사 이항복 선생 신도비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인목대비 폐출 막다 화

백사는 광해군이 즉위해 옹립한 일당들 사이에 인목대비 폐모론(廢母論)이 일자 앞장서서 부당함을 주장했다. 광해는 백사가 선왕이 가장 총애했던 공신임을 알면서도 이이첨 일당의 탄핵에 속수무책이었다.

인목대비의 폐모가 눈앞에 다가오자 백사는 궁궐에 나가 광해에게 헌의(獻議: 의견을 드림)했다. ‘자식이 모친을 폐위함은 천하의 불효이며 이제 효로써 나라를 세우려는 시기에 만부당하다’고 극간했다.

백사 친필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백사 친필 (출처: 이재준 역사연구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9

이 헌의로 사간의 탄핵을 받은 백사는 여러 곳을 전전하다 북청으로 유배됐다. 이 유배길이 백사의 최후 인생의 여정이 된다. 양아들처럼 따랐던 정충신(후에 충무공 시호, 영의정)의 부축을 받아 북청으로 가는 길에 많은 관리, 백성들로부터 문안을 받았다. 덕망이 있던 영상대감의 유배길은 그래서 외롭지 않았다. 정충신이 쓴 북천일록(北遷日錄)에는 당시 유배길의 이모저모가 기록되고 있다. 한 평생 자신보다는 임금과 나라의 대의를 위해 살다간 거인의 풍모를 읽을 수 있다.

백사는 63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했다. 광해는 관직을 복구하고 예의를 갖춰 장례를 모실 것을 명했다.

북청에서 선영이 있는 포천까지는 천리 길. 무더운 여름 상여행렬은 3개월이나 걸렸다. 상여가 지나가는 길에는 백사의 타계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많은 백성들이 나와 조문하고 선비들은 앞을 다퉈 만사(挽詞:죽은 사람을 위해 쓴 글)를 썼다. 백사가 평소 존경 받는 위민(爲民) 명재상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도움말: 이재준 역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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