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친왕 전하의 외아들인 이구는 불초한 점이 적지 않습니다. 이구는 왕가의 비극을 총체적으로 경험하는 운명에서 그것을 감당하기에 벅찬 것이 있을 것입니다.              
                                                                                            - 어머니 이방자 여사의 유언

올해는 경술국치 100주년이자 광복 65주년으로 나라 잃은 설움과 해방의 기쁨을 곱씹어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잃어버린 대한제국 황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제의 탄압으로 자유롭지 못했고 광복과 동시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던 황실. 그들의 후손들은 쉬쉬하며 살고 있었으나 이구 황태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잔잔했던 황실에 파동이 일고 있다.

이구 황태손 회은 5주기 ②
의문사로 역사 속에 묻힌 마지막 황태손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2005년 7월 18일 이구 황태손이 일본의 한 호텔 화장실에서 갑작스레 죽음을 맞이한다. 일본 경찰은 이구의 사망원인을 ‘허혈성심부전’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일본 측이 공개한 사체검안서에는 의사의 소견과 직인을 찾아볼 수 없다.

일본 경찰이 이구의 사망 경과와 원인을 허술하게 조사해 성의 없는 사체검안서라는 지적이 일고 있다. 사체검안서 외에도 전주이씨대동종약원(종약원) 측이 주장하는 양자 약정서에서 드러나는 의문점이 역시 많은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 일본 경찰 측은 이구 황태손의 사인을 허혈성심부전이라고 진단했다. (국제형사경찰기구 제공)

◆ 허술한 사체검안서

본지가 접수한 사체검안서에서 사인이 ‘허혈성심부전’이라고 나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경찰이 발표한 결과에는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있다.

이구의 사망 직후 모습을 본 이석 황실문화재단 총재는 “얼굴 외에 다른 부분은 괜찮았으나 얼굴과 입술이 시퍼랬다”며 “병이 있어 급작스레 죽은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일본 경찰이 대충 조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현장조사 시간이 순식간에 치러진 것에 대해서도 비난의 여론이 거세다. 7월 18일 오후 6시 35분부터 진행된 현장조사는 30분 만에 모든 게 끝난 것으로 기록됐다. 아울러 사체검안서의 의사 소견란에도 어떠한 설명이 없어 변사체에 대한 조사가 허술했음을 시사한다.

이 총재는 “이구 황태손의 죽음은 의문사로 역사 속에 묻혔다”면서 “직접적 사인이 허혈성심부전으로 추측된다고 (일본 측이) 밝히고 있으나 검안서에 보면 황태손의 병력과 기존 건강상태에 대한 기록이 없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 종약원과 불화로 생활비 끊겨

이구 황태손은 죽기 직전에도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종약원은 사고 후 장례식 도중 후계자를 만들기 위한 약정서를 들이밀면서 이구의 양자로 이원(이상협)을 내세웠다. 하지만 사후 양자입적은 이미 1990년 민법 개정에서 폐지됐기 때문에 종약원 측에서 내세운 이 이 논리는 빈약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구가 사망하기 1주일 전에도 양자와 관련해 종약원이 이구를 압박했다는 주장이 있다. 안천 서울교대 교수는 “종약원 측이 양자 선임을 거듭 요구했으나 이구 황태손은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이구 황태손은 양자 선임과 관련해 추후 2~3년을 더 지켜보고 결정한다고 약정서에 적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종약원 측은 양자 선임을 빌미로 황태손에게 지급되는 정부 지원금을 약 6개월간 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정부 지원금은 조선황실에 품위 유지 명목의 생활비로 지급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지원금은 종약원을 통해 이구에게 지급됐었다. 하지만 이 총재 측근의 말을 빌리면 종약원은 이구가 양자 선임에 선뜻 동의하지 않자 생활비를 전달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구는 집세를 낼 수 없어 원래 살던 집에서 나가 외가 쪽인 나시모토가(家)에 손을 벌리게 됐다.

나시모토가의 계승자인 나시모토 타카오는 “반년 정도 (생활비) 지급이 안 됐다”며 “종약원 측은 약속을 안 지켰다며 보내주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이와 관련해 이환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이사장은 지난달에 방영한 MBC ‘시사매거진2580’에서 이구 황태손이 종묘대제 및 종약원 주요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늦게 보냈지 꼬박 지급했다고 해명했다.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정부 지원금이 6개월간 지급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 총재는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상황”이라며 “종약원은 양자 들이는 것에 자신들 뜻대로 되지 않자 생활비를 끊은 셈”이라고 한탄했다.

한일강제병합의 결정적 희생양인 이구 황태손. 그는 태어나서부터 마지막까지 한국과 일본 양국 사이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늘 정체성으로 고민했다.

다만, 그의 젊은 시절을 추적해 볼 때 배움에 목말라 유학길에도 오르고, 한국에 들어와서 새문안교회를 설계하는 등 건실한 청년으로서 생활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방자 여사의 비서를 맡았던 김상렬 씨는 “이구 전하는 얌전하고 정직했다”고 회상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