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지난주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북미정상회담을 보면서 역시 미국이 위대한 나라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두 정상 간 세기적인 회담 결과인 북한 보유 핵의 폐기와 북한 정치체제의 보장 약속으로 한반도 평화를 위시해 세계평화의 물꼬를 틔운 공과도 돋보였지만 공동성명서에는 또 하나 미국의 위대함과 자존심이 들어있었다. 즉 “미국과 북한은 신원이 이미 확인된 전쟁포로, 전쟁실종자들의 유해를 즉각 송환하는 것을 포함해 유해 수습을 약속한다”는 내용이었으니 이는 6.25전쟁 중 전사한 미군에 대한 국가 차원의 당연한 의무이자 예의인 것이다.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60만명을  파병, 그중 5만 4천여명이 전쟁통에 희생됐다. 미 국방부 ‘전쟁포로, 실종자 확인국(DPAA)’ 자료에 의하면 한국전쟁 미군 실종자 가운데 약 8천명의 유해를 아직까지 찾지 못한 상태로 있다. 과거 한때는 북한지역에서 실종 미군의 유해 작업이 추진돼 발굴된 유해가 미국으로 송환되긴 했지만 2007년 이후 북미관계가 악화되면서 끊겨졌던 것인데, 다시 북한에서 미군 유해 발굴 작업이 재개된다는 소식은 인도적 차원에서 매우 좋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정부에서도 남북관계가 개선된 이 시기에 6.25전쟁 중 북한지역에서 전사·실종된 국군에 대한 유해 발굴 작업이 이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때마침 다음 주가 6.25전쟁 발발일이라 호국보훈의 의미를 마음에 새겨본다. 나라와 겨레를 위해 국내외에서 목숨을 바친 순국영령들과 호국장병들의 위업을 기리고 그들의 명예를 빛내주면서 또한 그 유족들에게 힘이 되게 하는 정부적 차원의 지원과 행사는 당연한 것이고 다다익선(多多益善)일 것이다. 우리 국민 또한 선구자들의 위업을 기리고 이웃의 보훈가족을 위로하는 마음이 넘쳤으면 하고 기대해본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영원히 기리겠다고 천명했고, 보훈 복지 사각지대 해소와 눈높이에 맞는 보훈 심사 노력을 약속한 바 있다. 또 호국보훈의 달을 맞은 지난 5일 “애국과 보훈의 가치를 더욱 높여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는데, 그동안 보훈가족들과 사회단체들의 지적을 받아온 법령 미비와 예산 부족 등은 마땅히 갖춰야 할 보훈 예우에 다소 맞지 않은 핑계거리로 조속히 개선돼야 하겠다. 

독립운동가 중에는 ‘최재형(崔在衡)’이란 분이 있다. 그분의 큰 애국적 활동과 가족들의 구국 공로를 필자가 모르고 지나칠 뻔 했는데 보훈의 달 계기로 관련 자료를 정독하면서 바로 알게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역사나 자료에 의해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일제치하에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한 대규모 해외 거점은 세 곳 있었다. 지역별로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미국에 이승만. 중국에 김구 선생이 있었다면 러시아에는 최재형(1858~1920) 선생이 있었다. 최 선생의 명성은 생소하긴 하지만 자료에서 드러난즉, 그분들과 대등한 위치로 대단한 독립운동가였다.   

최재형 선생은 당시 러시아 한인마을에서  ‘페치카’로 통했다. 러시아 항일 독립운동의 대부(代父)인 최재형 선생을 두고 사람들은 한인들을 보호해주는 ‘난로’라는 뜻으로 ‘최 페치카’라고 호칭했던바 그만큼 러시아 지역에서는 정신적 지주, 재정적 후원자로서 역할을 했다는 뜻이다.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이주한 후 러시아에 귀화한 그는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을 이기고 고생한 끝에 사업가로 성공했다. 전 재산으로 러시아에 있는 한인들의 교육사업에 쓰면서 의병 양성 등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일어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도 최 페치카가 계획을 세우고 거사 자금을 후원했으니 ‘최재형이 없었다면 안중근도 없었다’라는 말이 나돌 정도다. 최 페치카는 안중근 의거 후 일본의 압박이 조여든 가운데 불의의 습격을 당해 1920년 4월 5일 일본군에 의해 체포돼 이틀 만에 총살당했고 그의 시신은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고 무덤조차 없다. 남편을 도와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부인 최 헬레나와 자녀들은 1937년, 소련정권에 의해 강제이주당해 뿔뿔이 흩어졌고, 1952년 사망한 최 헬레나는 키르기스스탄 비쉬케크 공동묘지에 홀로 잠들어 있다. 

일생을 구국활동에 바친 최재형 선생의 위패가 2015년이 돼서야 국립묘지에 모셔졌던바, 선생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정부의 대우가 낮은 것은 그가 러시아 국적자이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또 공훈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최재형 부인’이란 기록만으로는 안장이 안 된다는 게 정부 입장이어서 부부 합장도 불가능한 상태다. 무릇 ‘바늘 가는 데 실이 가기’로 남편이 하는 일에 부인이 마다했을까. 지금도 그들이 살았던 우수리스크의 한인들 사이에서는 러시아 최고의 독립운동가로, 조선인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판에 정부는 부부 합장에 미비된 규정을 따지고 소극적이다. 그래도 러시아의 벽난로, 최 페치카 부부의 독립운동은 천추에 길이 빛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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