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사)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얼마 전까지 우리는 북한의 개혁 개방 롤모델하면 중국이나 베트남을 떠올렸다. 물론 시작 단계에서는 두 나라가 분명하다. 그러나 북한 시장경제 발전의 종착역은 당연히 싱가포르라는 것이 북미정상회담을 지켜온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견해다. 몇 가지 점에서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다. 싱가포르는 이념적으로 유교사상을 중시하는 나라다. 북한의 주체사상이 수령숭배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이다. 또 3대 세습이라는 정치문화에서도 싱가포르와 북한은 너무 닮은 점이 많다. 다만 분단국가라는 대결구도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알려진 대로, 싱가포르는 국제통화기금(IMF) 2018년 전망치를 보면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명목 금액 기준으로 세계 8위인 6만 1766달러다. 구매력 기준(PPP)으론 9만 8014달러로 산유국 카타르(12만 4927달러)와 유럽 강소국 룩셈부르크(10만 9192달러)에 이어 세계 3위의 부자 나라다.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는 이미 70년대 후반 상당한 경제·사회 발전을 이뤘다. 이런 싱가포르가 중국의 78년 개혁·개방 정책 시작 이후 자금과 경제성장 노하우의 주요 공급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졌다. 

중국의 개혁 개방의 지도자로 통칭되는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은 부총리 시절이던 78년 11월 중국 지도자 가운데 처음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해 리콴유(李光耀, 1923~2015) 초대 총리를 만났다. 덩은 깨끗하고 경제적 활력으로 넘치는 이 도시국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 프랑스에 근공검학(勤工倹学: 부지런히 일하고 절약해서 공부함) 고학생으로 유학을 가던 중 목격했던 과거 낙후된 모습을 기억하는 덩에게 싱가포르는 상전벽해(桑田碧海)를 이룬 혁신의 현장이었다. 

덩은 개혁·개방을 처음 제안한 역사적인 현장인 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싱가포르 발전상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싱가포르를 거울삼아 나라를 개방하고 외자를 유치하기로 결정했다. “나의 꿈은 중국에 싱가포르 같은 도시를 1000개 세우는 것”이라는 덩의 발언에 이런 역사가 녹아있다. 

덩은 1992년 1~2월 우한(武漢)·선전(深圳)·주하이(珠海)·상하이(上海) 남방 지역을 시찰하고 담화를 발표한 남순강화(南巡講話)에서 싱가포르를 질서유지의 모범 사례로도 거론했다. “싱가포르는 훌륭한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이를 잘 관리하고 있다. 우리는 싱가포르의 경험을 활용해 그들보다 더 나아질 방법을 찾아야 한다.” 덩은 싱가포르에서 경제개발은 물론 체제유지의 아이디어까지 함께 얻은 셈이다. 그 뒤 봇물이 터졌다. 수만명의 중국 공산당원이 싱가포르에서 사회보장·조직관리·사회관리·도시화 등에 대한 노하우를 연수받고 관련 소프트웨어를 받아들이고 있다. 싱가포르는 중국과 합작으로 장쑤(江蘇)성 쑤저우(蘇州)에 쑤저우 공업원구를 건설해 자국 방식으로 운영한다. 중국 속 싱가포르다. 화베이(華北)성 톈진(天津)의 생태환경 도시, 광둥(廣東)성 광저우(廣州)의 지식도시, 쓰촨(四川)성 청두(淸都)의 혁신첨단과학단지 등을 양국 합작으로 건설했거나 건설 중이다. 싱가포르는 중국의 경제 파트너로서 철저한 계획, 투명한 결정, 효율적 관리, 지속적이며 책임을 다하는 자세로 호평을 받아왔다. 북한의 김 위원장은 지난 11일 밤 싱가포르 주요 명소를 돌아봤다. 중국 개혁·개방의 본보기가 된 이 도시에서 김 위원장이 미래에 대한 영감을 얻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작지 않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는 법이다. 경제성장의 그늘에 가린 이 나라의 내밀한 속살 공개다. 개인의 자유보다 공익과 유교적 도덕을 우선시하는 싱가포르의 실제 모습들은 충격적이다. 

더 놀라운 일은 싱가포르 정부가 국민을 통제하고 있다고 당당히 밝히고, 국민은 묵시적으로 정부에 동의한다는 사실이다. 군사적 위협이 없어 보이는데도 모든 남자는 2년간 군 복무를 의무적으로 하며 97년에는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방공호를 설치하도록 법제화한 점도 흥미롭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은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한 몸이라고 외쳐왔지만. 서구식 민주주의를 거부하면서도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싱가포르는 또 하나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생큐 라(감사합니다)” “굳모닝 라(안녕하세요)”처럼 한마디 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말끝에 ‘라’를 붙이는 싱가포르식 영어 ‘싱글리시’는 영어를 쓰면서도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발달한 것이라는 해석이 그중 하나다. 김정은 위원장의 싱가포르 따라 배우기는 벌써 원산시에서 시작됐다. 말레이시아 설계가가 설계한 원산은 싱가포르를 롤모델로 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관광객을 조준한 원산시는 북한 경제의 ‘산소공급기지’로 외화조달을 책임지게 될 것인지, 즉 과연 중국의 상하이처럼 상전벽해를 이룰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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