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교통·통신] ⑧“인력거냐 자동차냐” 피할수 없는 숙명
[선조들의 교통·통신] ⑧“인력거냐 자동차냐” 피할수 없는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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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과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이는 거리를 단축시키고, 삶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발전은 거듭되고 있다. 과거에도 교통과 통신은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관련해 옛 선조들이 누린 교통과 통신 문화는 어땠는지 알아봤다.

우편엽서에 홍화문 광장, 홍화문 · 인력거꾼 · 한복을 입은 행인들이 보인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4
우편엽서에 홍화문 광장, 홍화문 · 인력거꾼 · 한복을 입은 행인들이 보인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4

1911년 車 2대던 시절

인력거는 무려 1217대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개화기에는 바퀴가 달린 교통수단이 등장해 시민들의 두 발을 자유롭게 했다. 대표적으로 ‘인력거’와 ‘자동차’가 있다.

먼저 인력거는 바퀴 위에 가마 같은 것을 만들어 손님을 태운 것으로, 사람이 끄는 수레를 말한다. 인력거는 상류층이 가마 대신 많이 이용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인력거가 들어온 것은 1894년(고종 31)이다. 당시에 일본인 하나야마가 10대를 수입해 서울 시내 및 서울과 인천 간에 운행한 것이 시초였다. 초기 인력거는 일본인이 끌었으나 이후 우리나라 사람이 맡아서 운영했다.

인력거는 기생들이 요긴하게 사용한 수단이었다. 만약 여염집 부인이 인력거를 탈 경우 기생으로 오인 받지 않으려고 차 앞의 장막을 내려 누가 탔는지 알 수 없게 했다.

인력거는 서울 시내와 서울~인천 간 운행했다. 오늘날 택시처럼 길에 서 있는 사람이 인력거를 멈춰 세운 후 요금을 주고 도착지까지 이용하면 됐다. 이후 부산이나 평양, 대구 등 지방 도시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골목이나 언덕 등은 인력거로 이동이 가능해 큰 인기를 얻었다.

늘어나는 인력거로 인해 1908년 8월 15일 ‘인력거영업 단속규칙’이 경무청령 제3호로 발포됐다. 인력거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이것이 교통질서 뿐 아니라 가로의 미관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 때문에 이 같은 규칙이 제정된 것이었다. 이와 비슷한 규칙이 3개월 전에 발표되기도 했다.

모두 28개 조문으로 구성된 ‘인력거영업 단속규칙’은 매우 상세한 법령이었다. 인력거꾼은 18세 이상 60세 미만인 자로 해야 했다. 차체검사증, 차체와 그 부속품, 영업허가증, 인력거꾼의 복장, 승차거부 행위, 야간점등, 운행속도, 주차장, 영업자조합, 개인영업자 등 오늘날의 택시나 버스 영업을 방불케 했다.

앞면은 상점이 좌우로 늘어선 남대문로를 찍은 사진이 갈색으로 인쇄됨. 도로에는 전차로가 보이고, 자동차와 인력거 등이 보인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4
앞면은 상점이 좌우로 늘어선 남대문로를 찍은 사진이 갈색으로 인쇄됨. 도로에는 전차로가 보이고, 자동차와 인력거 등이 보인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14

개화기에는 자동차도 등장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종황제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미국공사 알렌을 통해 고종황제 전용 ‘어차’로 미국 자동차 1대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은 남아있지 않다.

그 후 1911년 고종황제가 타기 위해두 번째로 영국으로부터 다임러 리무진 한 대가 국내로 들어왔다. 이후 상류층 사이에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차츰 생겨났다.

1911년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2대있던 시절, 인력거는 1217대였다. 1923년에는 4647대로 늘어났다. 1924년의 자가용인력거는 1509대에 이르렀는데, 그중 936대가 한국인, 482대는 일본인, 77대는 프랑스인이 소유했다.영업용 승용차는 1912년부터 운행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 시간을 타는 데 쌀 반가마니 값에 해당하는 5원을 받았다고 하니 정말 비쌌다.

인력거는 점차 늘어나는 임대 승용차(택시)에 밀려 자리를 잃어갔다. 승객확보를 위해 삯도 낮췄지만 소용없었다. 1931년에는 자동차가 4331대로 늘어났지만, 인력거는 2631대로 감소하고 말았다.

그러다 광복 후 서울 시내교통에는 시대에 역행하는 기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미 도시교통에서 도태된 지 오래된 승합마차와 인력거가 여객 수송수단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발달하는 교통수단에 밀려 인력거는 결국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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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현 2018-06-14 11:03:22
인력거 하니까 운수좋은 날이 생각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