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송범석 기자] 백우선 시인의 사물에 대한 투시력은 정밀하고 미세하다. 시인은 절대로 현상을 넘겨짚지 않는다. 치밀한 사유의 더듬이를 동원해 사건을 관찰한다. 그는 단순한 감상적 취향을 벗어나 자신을 사물에 대비시키는데, 그 행위는 무뎌진 감각의 영역을 넘어 충만하게 다가온다.  삶에 감겨오는 교훈의 배음(背音) 속에서 독자는 또 다른 자신의 얼굴을 마주할 것이다.

네가 나를 훔치는 동안

네가 몰래 내 자리의 옆구리를 따고 / 네가 슬쩍 내 가방을 훔치는 동안 / 네가 내 돈, 신용카드, 주민등록증, 수첩, 운전면허증 따위를 훔치는 동안 / 나는 새봄과 함께 있었는데 / 나는 봄싹, 봄꽃, 봄소리에 나를 잃고 있었을 뿐인데 / 그동에 네가 내 가방을 훔친 것은 / 그동안에 네가 내 분신들을 훔친 것은 / 그동안의 나를 내게 보이려는 것이었을까? / 나도 무얼 훔치고 있었다는 / 나도 누군가의 땀, 휴식, 기쁨 따위를 훔치고 있었다는 것일까? / 그렇다면 너와 나는 동업 중이었던 것일까? / 아니면 내가 더 큰 도둑이었던 것일까?

화창한 봄날, 화신(花信)을 듣고 나가 순수함에 빠져있는 동안 누군가가 슬쩍 가방을 훔쳐간다. 생각이 깊어진다. ‘아! 그동안 나도 무얼 훔치고 있었구나’라는 깨달음이 번뜩인다. 그것은 상투적인 마음의 동요가 아니다. 이내 부조리한 현실과 그에 순응해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 대한 반성이 검붉은 바다 위로 떠오른다. 진실을 품은 조개가 입을 벌린다. 도둑갈매기가 날아오른다. 자본주의라라는 두건을 쓴 그 갈매기로부터 ‘진주’를 지켜내는 것은 이제 각자의 몫이다.

백우선 시집 / 문학의전당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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