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송범석 기자] 조선일보 기자 출신 최보식 씨는 자신의 비평적 세계관을 통해 한계점을 넘어선 새로운 지형도를 창조하는 데 탁월하다. <매혹>이 딱 그런 경우다.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의 서학(천주학) 이야기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다산은 훗날 서학의 괴수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광암 이벽을 만나 서학을 배우게 된다. 책은 이벽과 다산의 시점에서 바라본 서학과 주자학의 충돌을 그리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와 새로 유입된 이데올로기가 충돌할 경우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한다. 늘 그렇듯이 양자는 화해할 수 없는 대척점을 그리며 갈등과 균열을 낳고 시대와 인간을 갈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리고 지지기반을 얻지 못한 이데올로기는 세상의 경멸을 끌어안으며, 숱한 목숨을 대가로 내어놓는다.

주자학이 지배하는 공동체에서 서학은 ‘사학(邪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벽과 청년시절 정약용은 그 학문을 사랑했다. 위험한 아름다움을 위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던지는 청년들은 사회를 뒤엎을 수 있는 ‘매혹’에 끌렸던 것이다.

한 방울의 먹물이 번져나가듯 천주학을 받아들이는 청년들이 많아지자, 조정은 숙청작업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억누른다. 이를 저자는 “정신이 황홀한 만큼 육신의 한 부분을 떼어주는, 당시의 주고받는 시장논리였다”는 여운이 담긴 말로 표현한다.

천주학은 이내 사람을 죽이는 학문이 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서학이 주자학의 이념을 갉아먹어 사람됨을 망각하게 만든다’고 소리쳤고 또 다른 누군가는 서학을 끝까지 놓지 않아 죽음을 맞이했다.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쾌락’. 서학에 물든 조선 선비의 목이 떨어져 나가는 동안 배신을 통해 살아남은 사람은 자괴감에 빠져 생의 길을 잃는다.

정약용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학을 버렸지만 결국 서학을 배웠던 과거 때문에 발목이 잡혀 긴 유배를 가게 된다. 소설 속 정약용은 원인모를 병으로 요절한 이벽을 그리며 남은 생을 어렵게 살아낸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추억 속에 묻힌 혁명가를 그리듯이.

책은 정통 주자학을 공격하지 않으면서도 서학이 조선 속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모순을 균형 있게 설명하고 있다. 깊은 묘미가 있는 작품이다.

최보식 지음 / 휴먼앤북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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