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우리 헌법에는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103조).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가장 원론적인 표현이다. 양심, 다시 말하면 돈이나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시대적 소명과 사회적 상식 그리고 국민적 눈높이에 맞게 법관 각자의 소신껏 재판에 임해야 한다는 뜻이다. 법관에게 높은 도덕성과 강한 정의감을 요청하는 이유인 셈이다.

최근 박근혜 정부 시절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다양한 소식과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다. 정치권력이 부패하고 무능했다면 최소한 사법부만큼은 그 정치권력을 견제하고 흔들리지 않는 법치의 엄중함을 더 강고하게 지켜야 한다. 사법부에게 바라는 국민의 바람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국민의 바람은 허망했다. 

물론 대부분의 일선 법관들은 여전히 건강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럼에도 사법부의 수장인 대법원장과 그 주변 인사들이 특정한 재판을 놓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권력과 어떤 ‘거래’나 ‘흥정’을 하거나 정치적 고려를 했다면 그 충격은 실로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자칫 사법부 전체를 먹칠하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법부를 신뢰한 국민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요,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다는 비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치의 막장, 대법원까지 이럴 수가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는 대학교수와 변호사들이 모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지 못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부패한 박근혜 정권과 ‘재판거래’를 했다는 날선 비판을 쏟아냈다. 그리고 당일 오후 국회에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법농단 피해자 증언대회’도 열렸다. 이 자리에는 당시 재판거래 피해자로 전해지고 있는 철도노조 KTX 승무원 지부의 김승하 지부장이 참석해 그간의 고통을 담담하게 증언했다. 김 지부장은 “대법원 판결이 뒤집어지면서 4년 동안 지급 받았던 임금이 모두 빚이 되었다. 1억원이 넘는 빚으로 이혼을 고민하는 조합원이 있었고, 결국 목숨을 끊은 동료도 있다”면서 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의혹 실태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리고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김세은 변호사는 “(대법원)특조단 조사보고서는 이병기 당시 비서실장이 ‘한일 우호관계 복원’을 위해 대법원에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사건에 대한 청구기각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요구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면서 “대법원이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판결을 미루고 있는 것에는 이런 배경이 아닌가”라며 의구심을 떨쳐내지 못했다. 정말 사실이라면 ‘법치의 막장’이란 것이 이런 것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양승태 대법원의 추악한 모습은 이런 내용만이 아니다. 법원행정처가 5일 추가 공개한 문건을 보면 ‘상고법원’을 설립하기 위해 박근혜 정부와 교감하면서 권력과 코드가 맞도록 재판을 고민한 흔적들이 그대로 나와 있다. 동시에 상고법원에 반대하는 내부의 판사들에 대해서는 회유와 압박, 심지어 재산조사까지 하면서 특별 관리한 정황도 나왔다. 이뿐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 인사들’이 대법원에 진출하면 ‘위험하다’는 식의 상식 밖의 의견이 적시돼 있는가 하면 청와대 비위를 맞추기 위해 ‘묘수’를 찾는 방안까지 거론됐다. 삼류 정치집단에서나 볼 수 있는 ‘정치적 뒷거래’의 현장을 보는 듯하다.

이번에 법원행정처가 공개한 98건의 문건은 일부에 불과하다. 특조단의 조사대상이었던 410건 가운데 4분의 1도 안 된다. 그리고 공개한 문건은 제목만 봐도 ‘VIP 보고서’니 ‘민변 대응전략’이니 하면서 정치적 또는 이념적 냄새가 물씬하다. 대법원장 주변에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제목만이라도 공개한 내용이 이 정도라면 나머지 공개하지 않은 문건의 내용은 도대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대법원장과 주변의 고위 인사들이 청와대 눈치나 살피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재판을 의도하거나 사법제도 등을 놓고 정치권력과 거래나 ‘로비’를 한 것이라면 이대로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삼권분립과 정치적 독립성 그리고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정치적 독립성’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대법원을 믿었던 국민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문건 전체를 공개하고 그 책임문제를 명확하게 가려내야 한다. 물론 검찰수사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물론이고 불법행위에 관여한 누구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양심 있는 법관의 재판정으로 넘겨야 한다. 어쩌면 직전의 대법원장이 검찰청에 출두하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대법원까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사법부 최대의 비극이지만 그동안 ‘적폐’가 어디까지 확산됐는지를 국민도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됐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새로운 대한민국’으로 가는 도정에서 썩은 곳이라면 직전의 대법원장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참으로 값진 교훈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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