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겸 동국대 교수 

 

20세기 후반 컴퓨터 프로그램을 복제해서 무단으로 유출한 행위에 대해 처벌을 해야 하는데, 이를 처벌할 형벌규정이 없어서 처벌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했다. 그래서 형법을 개정하고 특별형법을 제정해 프로그램을 복제해 유출하거나 판매해 이득을 취하는 행위를 처벌하게 됐다. 우리가 범죄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형사법에 그 행위에 관해 특정해서 범죄로 규정하고 이에 대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우리는 죄형법정주의라고 한다.

과거 군주시대에 죄형법정주의가 원칙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는 지배권력의 의중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군주의 명령이 법이었던 시대에는 군주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권력층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처벌을 받았다. 형벌은 인간의 신체를 침해하거나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누구나 이를 두려워했고, 강력한 형벌이 지배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계급이 형성되고 계몽주의를 통해 인간이 자각하면서 형벌의 야만성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근대국가의 법체계가 구축되는 과정에서 국가권력에 의한 자의적 형벌권 행사를 막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죄형법정주의이다. 죄형법정주의의 고전적 표현은 1789년 프랑스혁명을 통해 등장한 인권선언의 제8조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조항은 “누구든지 범죄 이전에 제정·공포되고 또한 적법하게 적용된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되지 아니한다”고 하여 죄형법정주의를 명문화했다. 이 이후 죄형법정주의는 확산됐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48년 국제연합의 세계인권선언에 명문화됐다.

우리나라도 1948년 건국헌법 이후 현행 헌법까지 죄형법정주의를 법치국가의 한 원칙으로 수용하고 있으며, 형사법에서는 기본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죄형법정주의는 헌법 제12조 제1항 후단의 법률과 적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과 제13조 제1항에서 행위 시의 법률에 의해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는 행위로 소추되지 아니한다는 것에 근거하고 있다. 물론 후자의 표현은 형벌불소급원칙으로 죄형법정주의로부터 파생된 원칙이지만, 이를 통해 죄형법정주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근거가 된다.

죄형법정주의는 인간의 보장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과거 국가 법체계가 구축되기 이전에는 국가권력은 자의적 형벌권을 행사함으로써 인권을 침해했고, 국가의 실정법이 존재하던 때에도 국가의 자의적 형벌권의 오·남용을 통제할 수 없어서 인권유린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국가의 기본법인 헌법에 죄형법정주의가 원칙으로 도입되면서 국가의 자의적 형벌권 행사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해졌다.

죄형법정주의는 국가의 최고규범으로 헌법이 효력을 갖고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인권의 보장을 위한 중요한 원칙이지만 국가사회주의가 지배하던 독일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에서는 부인됐고, 사회주의를 채택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인민재판을 통해 죄형법정주의는 무시됐다. 죄형법정주의는 국가에게 형벌권을 위임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공화국에서 국가의 형벌권 남용을 차단하기 위한 중요한 원칙이다. 국가의 실정법이 인권의 보호를 위해 작동한다고 하지만, 죄형법정주의가 확립되지 않으면 오히려 형식적 법률을 통해 인권이 침해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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