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바른불교재가모임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이 한국 불교 근현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바른불교재가모임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이 한국 불교 근현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바른불교재가모임 백도영 재야불교사연구가
 

“일제시대 전투기 4대 상납

징병 앞장서고 기도비 갈취

해방 후엔 군부 세력과 한배”
 

“조계종, 정치적 목적으로 탄생

부처님 가르침 ‘계·율’은 실종

스님들의 개혁 기대 어려워”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중고등학교 때부터 절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근현대 불교역사가 궁금했고, 스님들에게 물었죠. (한국불교 근대사에 대해서는) 어떤 스님들은 몰라서 이야기를 못해줬고, 알고 있는 스님들은 부끄러워서 차마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직접 찾아 나서기 시작했지요. 스님들은 알려주지 않는 불교의 역사를 파기 시작했어요. 지금 발생하고 있는 조계종의 모든 문제는 그 역사 속에 있었습니다.”

지난달 두 차례 MBC PD수첩 방영 이후 대한불교조계종은 ‘은처자’ ‘성추행’ ‘도박’ ‘배임’ 등 부패를 가리키는 온갖 수식어로 꼬리표가 달렸다. 현·전 총무원장과 교육원장, 대형 사찰의 주지 등 내로라하는 조계종 큰스님들이 대거 도마에 올랐다.

불자는 물론 국민들도 혀를 끌끌 차며 돈과 권력을 갖춘 권승들의 모습을 지탄했다. 조계종과 방송 대상이 된 스님들은 혐의를 전면 부인하며 방송을 비판했다.

그러나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자성의 목소리를 내며 참회를 촉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 불교 대표적인 종단 ‘조계종’은 어디서부터 단추를 잘못 꿰게 됐던 것일까.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깨우침을 줬다. 조계종의 역사가 궁금해졌다. 천지일보는 조계종단의 기록이 아닌 주요 신문기사에 실린 내용으로 직접 수집해 조계종의 근현대 역사를 수집하는 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소문 끝에 만난 이는 유명한 대학의 교수가 아니었고, 종단에서 불교사를 정리하는 스님도 아니었다.

◆ 직접 찾아 나선 ‘진짜’ 불교의 민낯

바른 불교를 만들겠다고 2015년 바른불교재가모임을 창립에 동참한 청년여래회 백도영 전 회장이었다. 그는 종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건축·인테리어를 직업으로 삼고 주경야독으로 한국불교 근대사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는 그가 모은 정보를 차곡차곡 정리해 자신이 운영하는 페이스북 ‘불교근현대운동사’에 연재했다. 신문과 각 사료들을 종합해 불교계가 걸어왔던 길을 날것 그대로 제공했다. 그를 4일 오후 서울 종로 한 차문화연구소에서 만났다.

백 전 회장은 “조계종에 승려의 범죄 행위들이 만연한 이유는 그 출발이 잘못됐기 때문”이라며 “이제라도 자신들의 시작을 돌아봐 잘못 끼워진 첫 단추부터 풀러 다시 끼워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야 한다”고 운을 뗐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후 초기 승려들은 두 가지 승려의 모습을 만들었다.

첫째 관제에 부역해 현실의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규정짓고 국가의 시책에 적극 협조하는 모습이었다. 그 대가로 보장받은 향락적 삶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러나 그 끝은 고려의 몰락이었다.

둘째 민간에 바탕을 두고 민중들의 삶과 함께 하며 민중들의 고통이 극에 달할 때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노력한 보살도의 모습이었다. 이들로 인해 불교가 지금까지 맥을 이어져 오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한국불교에는 경전 내용을 중심으로 신앙을 하는 교종과 티벳 불교처럼 염불이 주를 이루는 염불종이 맥을 감췄다. 경전의 내용을 연구하는 것보다 개인의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종’만이 살아남았다. 백 전 회장은 선종에 대해 “이현령비현령, 승려들은 알아듣기 어렵고 추상적인 말로 신자들이 입증하기 어려운 설법을 하며 오로지 개인의 깨달음을 강조했다”며 맹점을 지적했다.

이후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 500년 동안 불교는 종파와 종지를 잊고 살았다. 불교도 스스로가 종단을 만들어 종지를 세우지 못하고 국가에 의해 주도됐다.
 

1960년 대처승과 독신승의 사찰 뺏기 싸움은 대법원 판결을 놓고 극에 달했다. 당시 대법원은 대처승의 손을 들어줬고, 독신승은 이에 반발해 법원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일부 승려들은 할복난동을 벌였다. 비구승의 행패를 제지하는 경찰과 배를 가르고 병원에 입원한 승려(경향신문 1960.11.25). (제공: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1960년 대처승과 독신승의 사찰 뺏기 싸움은 대법원 판결을 놓고 극에 달했다. 당시 대법원은 대처승의 손을 들어줬고, 독신승은 이에 반발해 법원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일부 승려들은 할복난동을 벌였다. 비구승의 행패를 제지하는 경찰과 배를 가르고 병원에 입원한 승려(경향신문 1960.11.25). (제공: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1960년 대처승과 독신승의 사찰 뺏기 싸움은 대법원 판결을 놓고 극에 달했다. 당시 대법원은 대처승의 손을 들어줬고, 독신승은 이에 반발해 법원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일부 승려들은 할복난동을 벌였다. 유치장에서 구속을 기다리는 독신승들(동아일보 1960.11.26). (제공: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유치장에서 구속을 기다리는 독신승들(동아일보 1960.11.26). (제공: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1960년 대처승과 독신승의 사찰 뺏기 싸움은 대법원 판결을 놓고 극에 달했다. 당시 대법원은 대처승의 손을 들어줬고, 독신승은 이에 반발해 법원에 난입해 유리창을 부수고 일부 승려들은 할복난동을 벌였다. 당시 조계사에서 대법 판결을 앞둔 독신승의 단식 모습. (제공: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당시 조계사에서 대법 판결을 앞둔 독신승의 단식 모습. (제공: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 대한제국-일제-군부에 달라붙은 ‘불교’

1902년 4월 11일 대한제국은 ‘포달(布達)’ 제80호로 사서관리서(寺社管理署) 설치해 권종석으로 하여금 전국사찰을 조직하게 했다. 이를 통해 현 불교종단(원종 元宗)이 처음 시작하게 된다. 국가에 의해 만들어진 종단인 만큼 원종의 승려들은 국가정책에 충실히 따르는 승려들이 득세하게 됐다. 이후 1910년 조일합방 후 원종은 일본 조동종과 합병을 하게 됐다. 일본에 충실한 불교승려들이 권세를 얻게 됐다. 당시 승려들은 일제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징집에 나섰고, 전쟁터로 끌려간 청년들을 무사히 돌아오게 하는 기도를 해주겠다며 종도들로부터 기도비를 받아 챙겼다. 일제의 지원을 받고자 전투기를 4대나 지원하기도 했다.

일본 강점기를 지나 해방을 맞고 불교계에서는 그동안 일본제국에 기생해 권세를 누렸던 불교종단 문제를 비판하는 혁신불교도들이 생겨났다. 불교의 원래 가르침으로 돌아가 사유재산을 없애고 탁발로 먹고 살며 중생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미 재산이 풍족했던 기득권 승려들의 귀에 이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한국전쟁과정에서 월북했다.

이후 남쪽에서는 남겨진 불교재산의 소유권을 두고 정화란 이름으로 9년간 폭력이 난무하는 시간을 보냈다. 가정을 꾸린 대처승과 독신승의 대립이었다. 당시 스님 중 대다수는 대처승이었다. 100~200명 정도가 독신승 즉 비구였을 뿐이었다. 당시 세가 절대 부족하던 비구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 권력과 손잡고 급조된 비구 승려를 양성해 폭력을 동원해 사찰 강탈했다.

4.19 혁명으로 뺏은 사찰을 토해내는 가 싶었지만, 5.16 군사반란을 맞았다. 당시 수세에 몰린 비구 측과 군사정권에 협조적인 세력을 원하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해타산이 겹쳤다.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바른불교재가모임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이 한국 불교 근현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천지일보=강수경 기자] 바른불교재가모임 백도영 청년여래회 전 회장이 한국 불교 근현대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6.6 

◆ 조계종의 탄생 배경 “정교유착”

이런 배경에서 탄생한 종단이 1962년 4월 ‘통합 대한불교조계종’이다. 태생부터가 종교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다. 정교유착 종교단체가 만들어진 셈이다.

백 전 회장은 “계와 율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이 없는 상태에서 권력의 힘에 굴복해 만들어진 조계종은 출범 직후 다시 분열됐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3년 5월 31일 불교재산관리법을 통해 당시 1231개의 사찰을 종단에 등록하게 해줬다. 주지 임명권과 재산처분권은 문교부장관이 가졌다.

백 전 회장은 “조계종 인사권을 정부가 가진 것이 오늘날 불교적폐가 시작된 근본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독신승들은 1229개의 절을 나눠 갖고 살며 문중을 만들었다. 시간이 흐르며 문중 권력의 핵심을 가진 본사 주지 자리를 둘러 싼 승려들의 암투가 시작됐고, 이게 확대된 것이 지난 시기 조계종 승려들의 싸움이라는 설명이다.

시간이 흘러 불자는 점점 감소했고, 불전을 통해 얻는 수입이 줄자 종단 권력을 유지하는 바탕을 사찰관람료나 정부부조금에 두게 됐다.

이에 따라 정부보조금의 신청과 배분을 하는 종단권력은 카르텔이 더욱 공고화되며 PD수첩에 나온 내용처럼 승려들의 일상이 됐다는 날카로운 분석이다.

백 전 회장은 “조계종단의 문제는 지난 역사에 축적된 적폐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상태를 넘어선 상태”라며 “1994년이나 1998년 사태를 되돌아 보건데 승려가 다시 해결의 중심에 선다면 과거와 같은 상황의 반복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스님들의 부패가 만연하자 1994년 4월 10일 승려대회를 통해 스님들이 종단개혁을 외치며 일어났지만 미완성에 그쳤다. 1998년에는 총무원장 선거를 놓고 종단 분규가 일어났다.

백 전 회장은 조계종의 개혁은 스님들로서는 이뤄질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재가 불자들이 나서서 주인이 돼 불교를 감사하는 감시 주체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불교계의 단 1% 정도에 해당하는 승려는 사찰과 종단에서 모든 권력을 모두 포기하고 수행과 교화에만 전념해야 하죠. 사찰과 종단의 운영은 신도회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이루고 있는 99%의 신도들에게 넘겨 사부대중이 화합한 종단을 만들지 못한다면 조계종의 미래는 없습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