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이는 거리를 단축시키고, 삶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발전은 거듭되고 있다. 과거에도 교통과 통신은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관련해 옛 선조들이 누린 교통과 통신 문화는 어땠는지 알아봤다.

과거에는  궁궐  안에도  행정용  전화  10대가  있었다.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1876년 개항 대륙에서 해양으로’ 展에서 전시돼 있던 전화교환수 옛 모습.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과거에는  궁궐  안에도  행정용  전화  10대가  있었다. 사진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1876년 개항 대륙에서 해양으로’ 展에서 전시돼 있던 전화교환수 옛 모습.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국내, 1885년 처음 전신 도입
‘다리풍·어화통’ 옛 명칭 다양
궐 안에도 행정용 전화 설치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개화기에는 획기적인 통신 수단이 등장했다. 바로 ‘전신(電信)’이다. 전신은 선만 연결하면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서울~인천 첫 전신 설치

전화기의 옛 명칭은 다양했다. 1880년경에 청나라에서는 다리풍(爹釐風)으로 불렸음을 정관응의 이언(조선 후기 우리나라에 유입된 개화 자강에 관한 서적)을 통해서 처음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전화기 실물을 직접 접한 시기인 1881년과 1882년도에는 어화통(語話筒), 덕률풍(德律風) 등으로 불렀다. 일본에서는 1887년부터‘전화(電話)’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전신이 도입된 것은 언제일까. 바로 1885년이다. 이 당시 서울과 인천 사이에 처음으로 전신이 설치됐고, 1888년에는 서울과 부산 간에 전신 시설이 가설됐다. 전보 관할은 ‘한성전보총국’에서 담당했다. 전신업무는 한문·영문·불문(佛文)의 전보를 취급했고 한글전보는 없었다. 요금은 거리를 계산하는 차등 요금제였다.

◆고종, 전화로 칙령 내려

궁궐 안에도 행정용 전화 10대가 설치됐다. 고종은 신문물인 전화를 무척 애용했다. 혼란한 정국에서 다른 사람을 믿는 게 쉽지 않아 전화로 직접 칙령을 내리기도 했다. 고종이 건 전화에 벨이 울리면, 신하들이 세 번 절한 후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고종은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전화를 드려 조석 문안을 드리기도 했다. 또한 고종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을 죽인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김구를 사면하기 위해 인천 감옥에 직접 전화를 걸기도 했다. 본래 사형은 임금의 재가(裁可)를 받아 집행해야 하는 법이었다.

전신기 모습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31
전신기 모습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31

그때 승정원승지가 각 죄수의 심문서를 보다가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는 재가 수속을 끝낸 안건을 고종에게 보였고, 이어 어전 회의가 열렸다. 이후 고종은 인천감리에게 전화를 걸어 죄를 한 단계 감하도록 명해 김구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는 서울과 인천에 전화가 가설된 지 불과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후 고종은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궁궐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가 1919년 눈을 감았다. 그러자 효심 깊은 아들 순종은 홍릉에 있는 고종의 무덤까지 전화를 가설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통화할 수 없음에도 전화를 가설한 이유는 무엇일까. 순종은 예의를 갖춰 아버지 상을 치르고 싶어 했지만 일본의 반대에 부딪혔고, 이에 전화를 가설해서 곡을 한 것이었다.

◆전화, 왜 건다고 할까

흔히 ‘전화를 건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초기 전화 사용법에서 온 말이다. 과거에는 전화 통화를 하려면 교환수를 거쳐야 했다. 이때 수화기를 고리에 걸고 손잡이를 돌리면 교환수와 연결됐는데, 이에 ‘전화를 건다’라고 표현했다. 그때 사용하던 표현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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