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현 문학박사

 

▲ 성주현 문학박사ⓒ천지일보(뉴스천지)
서세동점의 시기 성리학을 모태로 한 유림세력은 위정척사의 민족주체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위정척사의 민족의식의 특징은 존주사대(尊周事大)와 자주를 모순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대(事大)’란 말은 <맹자>에서 유래되었다.

전국시대의 제나라 선왕이 이웃나라와 교제하는 방법(交隣之道)을 물었는데, 맹자가 대답하기를 “사대(事大)와 사소(事小)가 있어 인자(仁者)라는 것은 능히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섬기는 것이고, 지자(智者)라는 것은 능히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는 크고 작은 나라가 서로 예를 갖춤으로써 평화를 달성한다는 의미를 뜻한다. 그러한 점에서 사대는 굴종과 복종, 지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위정척사는 조선을 자주국가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하에 위정척사는 당시의 조선을 중화문화의 유일한 보류로 인식하여 민족자존의식을 고양시키는 한편 야만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저항하였다.

위정척사는 서양 세력이 도(道)를 어지럽히는 것을 가장 큰 위기로 보았다. 중화의 유일한 보류를 천신만고 끝에 지키고 있는 도가 끊긴다면 인류는 없어지고 금수만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위정척사는 국가보다는 도를 더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위정척사론자들은 국가는 오직 백성을 인도적인 삶을 실현하기 위한 기구로서 그 의의를 두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고는 도를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는 중요하게 인식하였다. 그러한 측면에서 위정척사는 서양과 같은 금수의 나라보다는 도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척사는 누구보다도 애국충정에 불탔던 것이다. 또한 후일 의병전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한편 서양문물이 새롭게 밀려드는 한말, 위정척사는 성리학적 예의문물을 수호하는 것을 무엇보다 중시하였다. 이처럼 예를 중시하였던 위정척사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옷과 두발에 두었다. 1884년 좁은 소매를 입게 하는 변복령(變服令)과 1895년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斷髮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군주의 명령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는 인식하에 변복령과 단발령에 죽음으로서 저항하였다. 특히 단발령은 일본제국주의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인식하여 을미의병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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