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 이야기(3)] 영조가 친히 찾은 ‘경희궁’
[궁 이야기(3)] 영조가 친히 찾은 ‘경희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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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궁 내 첫 번째 문인 숭정문 ⓒ천지일보(뉴스천지)


[천지일보=김지윤 기자]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한 서울역사박물관 뒤로 규모는 작지만 위엄을 풍기는 궁이 있다. 사람들은 도심 한복판에 하늘과 맞닿은 경희궁을 찾아 잠깐의 휴식을 맛본다. 다른 궁과 달리 무료입장을 할 수 있어 부담 없이 궁내를 둘러보는 관람객들. 다른 궁들에 비해 규모가 아담하다고들 하지만 궁은 궁인지라 걷다가 잠시 쉬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

경희궁은 새문안에 있기 때문에 새문안 대궐이라고도 한다. 이름 유래와 관련해 서대문을 빼놓을 수 없다. 한양 사대문 가운데 하나인 서대문은 태종 때까지 서전문(西箭門)이라 일컬어졌다. 경희궁 안쪽 옛 서울고등학교 본관 서편에 있었던 서전문을 보다 남쪽으로 옮겨 돈의문(敦義門)으로 이름을 바꿨다. 돈의문을 새로 지었다 하여 새문(新門), 서전문을 막아 새문(塞門)이라 불렀다. 서대문 안을 새문안이라 불러졌으며, 현재 신문로(新門路) 지명도 이로 인해 생겨났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지어졌으며 원래 명칭은 ‘경덕궁(慶德宮)’이었다. 경희궁으로 이름이 바뀐 때는 1706년으로 경덕궁이 경희궁으로 개명된 것은 영조가 장릉(章陵) 곧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의 시호(諡號)와 같아 이를 피하기 위해 이름을 바꿨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된 후 흥선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됐으며, 서궐인 경희궁은 이궁(離宮)으로 사용됐다. 경희궁 부지는 24만 661㎡로 정전, 동궁, 침전을 비롯해 모두 98채의 건물이 들어섰다.

경희궁에는 다른 궁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기이한 바위가 있다. 태령전(泰寧殿) 뒤편의 거대한 암반으로 이름은 ‘서암(瑞巖)’이다. 원래 이름은 왕의 바위인 왕암(王巖)이었다. 광해군이 이 바위를 보고 왕의 기운이 서린 것으로 판단, 이곳에 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숙종이 1708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쳐 부르고 어필(御筆)을 내렸으나 현재는 찾아 볼 수 없다.


역대 조선의 왕 가운데 경희궁에 가장 오래 머물렀던 왕은 바로 영조다. 영조실록 116권 1771년(영조 47년) 4월 6일자에는 ‘임금이 태령전에 나가 시임·원임 대신(大臣)을 불러다 합문(閤門)을 열도록 명하여 어진을 우러러 보았으며, 이내 숙종의 어제(御製)를 보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명하여 서암 및 영열천을 가서 보도록 하였다’고 기록돼 영조가 신하들과 함께 서암을 자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이토록 서암을 자주 찾았던 영조를 위해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태령전에 모셨다. 태령전은 본래 특별한 용도가 지정되지 않았던 건물이었으나 영조가 친히 아꼈던 바위 앞에 위치한 태령전에 영조의 어진을 모셔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 경희궁 정전인 숭정전 ⓒ천지일보(뉴스천지)


일제강점기에 와서 경희궁은 다른 궁들보다 심각하게 훼손됐다. 숭정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흥화문은 장충단으로, 광선문은 일본절로, 황학정은 사직단으로 경희궁 전각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문 흥화문 위치는 원래 현재의 구세군 빌딩 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가 1932년 흥화문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이었던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떼어갔다.
1910년에 경희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 터에 일본인을 위한 경성중학교를 세워졌다. 광복 후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서초동으로 이전하는 동시에 경희궁 발굴작업이, 1997년부터 복원작업이 이뤄져 지금 모습에 이르렀다. 영조가 아꼈던 경희궁이 해체 100여 년 만에 중심부만 복원돼 지난 2002년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됐다.

서울 시내 중심부에 자리 잡은 경희궁. 사람들은 역사의 아픔이 함께 담긴 이 궁궐이 서암의 기운을 받아 더 많은 전각들이 제자리 찾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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