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승병장 사명대사 유정 친필 2점 발견… “호국 사료로서 가치 커”
[단독] 승병장 사명대사 유정 친필 2점 발견… “호국 사료로서 가치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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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  1505호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출처: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5
보물 제 1505호 대구 동화사 사명당 유정 진영 (출처: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5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발견 자료 단독 입수
충효심경을 담은 오언시와‘
무량광(無量光)’ 적힌 현액
서울의 수장가 소장품서 발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임진전쟁 당시 승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워 크게 공을 세운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 1544∼1610)의 친필 두 점이 발견됐다. 임진전쟁 발발 426년을 맞아 찾아진 사명대사의 친필은 장지에 정자로 적은 시고(詩稿) 한편과, ‘무량광(無量光)’이라고 쓴 현액(懸額, 가로 글씨)이다.

사명대사의 유고와 친필은 얼마 남지 않아 귀중한 편이며, 몇 년 전에는 현판이 일본에서 찾아져 고국으로 돌아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23일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역사연구가)이 서울의 한 수장가의 소장품 가운데서 찾아 본보에 제보한 ‘사명대사의 친필’ 시고(28X26㎝), 현액(78X32㎝)은 사명대사를 연구하는 자료이자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호국 사료로서 가치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 위원은 “이번에 찾아진 사명대사의 시고는 임진전쟁이 끝나고 선조가 중신을 시켜 베푼 잔치에서 사명대사가 지은 헌시(獻詩)로서 평소 국가에 대한 그의 충성심과 효를 담은 내용”이라며“현판 ‘무량광’은 부처의 광명이 끝이 없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전 위원은 헌시의 말미에 쓰여 진 글(從來忠孝本無二爲勉吾 公益厚敦)은 사명대사의 신념과 같은 것으로 충효와 공익을 위한 돈독함을 담고 있다고 해석했다. 시의 첫 머리에는 ‘敬次榮宴席上韻(영예로운 자리에 위분에 붙임)’이라는 글이 있다.

이 전 위원이 의역한 내용은 이렇다.

‘餘慶方看積德門' 경사스런 봄날 적덕문을 바라보니

‘丹丘龍躍邑南村' 단구(신선이 사는 곳) 용이 읍남촌에 나네

‘螢忽去歲顯頭髻' 홀연히 세월 가니 상투에 어리고

‘利器今朝遇錯根’ 놀라운 병기가 조선의 어려움을 극복하네

‘宴席光生咸數郡’ 영광스런 연회에 여럿이 감격할세

‘紫樓花降沐洪恩’ 붉은 누각(궁전)에 꽃이 떨어짐은 임금의 은혜일세

‘從來忠孝本無二爲勉吾 公益厚敦’ 본래 충효는 하나뿐으로 힘써 기르고 공익을 위하고 돈독해야 한다

任 惟政 謹稿

임 유정 삼가 씀

사명대사 시고 (출처: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5
사명대사 시고 (출처: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5

◆사명대사 유정의 생애

사명대사는 경상남도 밀양 출신으로 풍천 임씨다. 수성(守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속명은 응규(應奎), 호는 사명당(四溟堂)이다.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해 신묵(信默)의 제자가 됐다. 그 후 직지사의 주지를 지냈다. 1575년(선조8) 선종의 중망(衆望:여러 사람에게서 받는촉망)에 의해 선종수사찰(禪宗首寺刹)인 봉은사(奉恩寺)의 주지로 천거됐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휴정(休靜)’을 찾아가서 선리(禪理:선에서 깨닫는 이치)를 참구했다.

1578년부터 팔공산·금강산·청량산·태백산 등을 다니면서 선을 닦았다. 대사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섰다.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의 격문을 받고 의승병을 모아 순안으로 가서 휴정과 합류했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이 돼 의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과 중화 사이의 길을 차단해 평양성 탈환의 전초역할을 담당했다. 1593년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됐던 평양성 탈환전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전공을 세웠다. 선조는 대사의 공을 인정해 ‘선교양종판사’를 제수했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적진에 들어가서 임진왜란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다. 특히 2차의 적진 담판을 마치고 돌아와 선조에게 그 전말과 적정을 알리는 ‘토적보민사소’를 올렸는데 문장이 웅려하고 그 논조가 정연했다.

사명대사 친필 (출처: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5
사명대사 친필 (출처: 이재준 전 충북도문화재위원)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5

대사는 적의 방어와 보민에 중요한 산성 수축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수축한 산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남한산성을 비롯, 팔공산성·금오산성·용기산성·악견산성·부산성 등이다. 군기제조에도 힘을 기울여 해인사부근의 야로(冶爐:불을 피울 때에 바람을 일으키는 기구)에서 활촉 등의 무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투항한 왜군 조총병을 비변사에 인도해 화약제조법과 조총사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1604년 2월 오대산에서 스승 휴정의 부음을 받고 묘향산으로 가던 중 선조의 부름을 받고 일본과의 강화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받았다. 일본 사신으로 간 이 시기 가장 큰 공로를 세웠으며 일본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대사가 묵었던 일본 대마도에는 지금도 대사를 숭모하는 유풍이 남아있다.

이 시기에 대사는 8개월간의 노력으로 성공적인 외교 성과도 거두었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그해 6월 국왕에게 복명하고 10월에 묘향산에 들어가 비로소 휴정의 영전에 절했다. 그 뒤 병을 얻어 해인사에서 요양하다가 1610년 8월26일 입적했다. 제자들은 홍제암(弘濟庵) 옆에 부도와 비를 세웠다.

◆日 혼묘지서 사명대사 유묵 발견되기도

한편 일본 구마모토에 있는 사찰 혼묘지(本妙寺)에는 1604년 사명대사가 닛신 스님에게 써준 법어 등 유묵 4점이 소장돼 있다. 이 절은 가토 기요마사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혼묘지에 소장 된 사명대사 친필은 서생포 회담에서 닛신스님에게 써준 ‘북해송운법어’ ‘북해송운일진사’ 등 4점의 유묵이며 보관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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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현 2018-05-26 22:30:33
나라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은 무신앙보다는 종교인이 더 크다. 입으로만 말고 행동으로 보이는 종교는 불교가 맞긴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