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산업화 효시와 민주화 성지의 양극화
[기고] 산업화 효시와 민주화 성지의 양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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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길 보릿고개와 정신의 고장성지 화 위원장
김원길 7대국가상징물연구소 소장

우리 민족은 보릿고개의 연속으로, 5천년을 하늘만 쳐다보며 농사를 지었다. 이러한 가운데 농업에 혁명이 일어났다. 20세기 후반인 1960~1980년대에 해발 300m 원주신림에서다.

당시 고질적인 가뭄과 불안전한 농업관개 등 자연조건을 극복하고 낙후된 농촌의 부흥과 식량증산을 위해 이 일이 추진됐다. 천수답(벼농사에 필요한 물을 빗물에만 의존하는 논)의 근본적 해결책인 수리안전답(수리, 관개시설이 잘돼 있어 물 공급이 안전해 가뭄 피해를 입을 염려가 없는 논) 개선을 위해 원주신림에 전국 최초로 농업용 지하수 개발시험장이 설치됐다. 이는 하천의 인입수로와 3곳에 관정을 뚫고 가뭄에 대비한 물량을 측정하는 시험인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2년간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1965년 2월에 이곳을 방문했다. 그는 현황을 청취하고 사람들을 격려하는 한편, 당시 수행하던 원성군수에게 “관리를 잘하라”고 당부했다. 이후 경지정리, 통일벼 개발, 비닐하우스, 농기구 기계화, 새마을운동으로 이어지면서 ‘민족 5천년의 보릿고개’가 사라졌다. 이것이 바로 산업화의 효시였다.

‘산업화 효시’와 ‘민주화 성지’는 국민을 행복하게 잘 사는 자유민주대한민국의 영원한 기반이 됐다. 그러나 양극화 현상은 심하게 나타나고 말았다. 30년이 지난 민주화 성지 광주 망월동은 교과서는 물론 기념관과 국가행사로 매년 성황을 이룬다. 반면 50년이 지난 산업화 효시 원주 마지들은 아는 국민이 없다.

역사적인 장소는 중앙고속도로 공사로 묻히고 남은 한 곳조차 복원되지 못한 채 녹슨 파이프와 옆의 표지석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의 차별화와 김영삼 정권의 민주화 시류에 막혀 주민성금으로 제작한 지하수개발 유적기념비조차 세우지 못하고 면사무소 뒤편에 5년여 방치됐다. 김대중 정권에서 ‘정부수립 50주년 기념 조형물’과 함께 유적비를 세우나 이어진 정권도 치적 달리로 관심 밖이다.

이러한 여건이라 개발시험 일과 결과조차도 몰랐다. 수소문 끝에 춘천에 거주하는 연로한 당시 면 직원을 통해 방문일 등이 춘천댐 준공일과 같다는 증언을 듣게 됐다. 이를 통해 국방일보 전신의 전우에서 ‘민족 5천년 보릿고개 극복효시’라는 역사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원주신림은 충북 북쪽과 강원 남쪽의 도계지역으로 원주서 치악산과 백운산 경계의 가리파재를 넘어다녀 눈만 오면 차량이 통제되는 두메산골이다. 이제라도 우리 민족 5천년 보릿고개 극복효시의 발굴을 통해 후대로 올바르게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극복 기념관’을 지어 국민의 교훈장으로 조성하고 기술극복상을 제정하면 매년 시상할 때 국가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교과서 게재는 물론 행사도 정부나 지자체에서 주관하면 좋을 것이다.

극복기념관에는 1950~1960년대 농업(농기구 등)실을 비롯, 지하수개발시험 등 군 대민지원실, 산업화와 민주화실, 국민행복(세계행사, 3대 스포츠, 한류 등)실, 도덕혼란(국정농단 등)실, 국가미래(국가관, 나라사랑)실, 강의실 등을 갖출 때 효과적이다.

또 마지들 일대의 관정복원과 신림공원확장, 가나안농군학교 연계, 5번 국도 확장공사 때 원주서 신림 간 보릿고개 극복터널, 가리파재일대 성역화 등 지역개발과 특산물 브랜드화는 관광자원화로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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