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백리(淸白吏)를 아는가. 청렴결백한 공직자를 의미하며, 오늘날 청백리상을 수여할 정도로 유명하다. 청백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200여명의 청백리가 배출됐다. 도덕·효·인 등의 덕목을 겸비, 이상적인 관직자인 조선의 청백리를 알아보자.

김종직 선생 모습이 담긴 그림 (출처: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2
김종직 선생 모습이 담긴 그림 (출처: 문학박사 조성린씨)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22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의 청백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은 김종직(1431~1492) 선생이다. 할아버지는 진사 김관(金琯)이고 아버지는 성균관 사예 김숙자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다. 단종1년(1453) 진사시에 합격하고 세조5년(1459)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해 학예와 문장을 겸하게 할 때 형 김종석과 함께 선발됐다.

1464년 감찰이 됐다가 파직됐으나 바로 경상도병마평사가 됐다. 그 후 교리.이조좌랑.수찬 등을 지냈다. 어버이가 나이가 많으므로 외직을 원해 1471년 함양군수로 나가 학문을 일으켜 인재를 육성하고 백성을 안정시키고 화목하게 하는 정사를 펼쳤다.

김종직 선생은 총각 때 날마다 수만 자(字)를 기억하고 20세 때에는 문명을 크게 떨쳤다. 어세겸이 그의 시를 보고 찬탄하여 “나는 그의 종 노릇 밖엔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성종이 문사들을 뽑았는데 김종직 선생이 제일이었다.

학문과 문장으로 당대의 영수(領袖)가 됐으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배워 얻는 것이 있었다. 학자들이 김종직 선생에게 칭찬을 한번 받으면 갑자기 유명한 선비가 되기도 했다. 당대의 도학(道學)·문장가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쏟아져 나왔다.

김종직 선생이 사망하고 6년 후인 연산군 4년(1498)에는 무오사화(戊午史禍)가 일어났다. 제자 김일손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 김종직 선생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됐다. 조의제문은 중국의 고사(故事)를 인용해 의제와 단종을 비유하면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 죽은 뒤에, 큰 죄가 드러난 사람에게 극형을 추시하던 일)를 당하고 많은 문집이 소각됐다. 또 많은 문인이 참화(慘禍)를 입었다. 중종반정 후 벼슬이 회복됐으며 숙종 때 영의정을 추증(追贈)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많은 시문과 일기를 남겼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유두류록청구풍아.당후일기 등이 있다.

정리=장수경 기자
도움말=문학박사 조성린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