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사)동아시아평화문제연구소 소장

 

북한은 지난 5월 16일 새벽 전화통지문을 통해 맥스선더훈련(한미공중연합훈련)을 이유로 남북고위급회담을 취소한다고 우리 측에 통보했다. 그 날 낮에는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리비아식 비핵화 모델’을 계속 주장해 온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사이비 우국지사’라고 비난하며 앞으로 북미정상회담에 응할지도 재고하겠다고 밝혀 한미 양국 정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리비아식 모델은 2003년과 2004년 사이에 리비아가 먼저 자국의 핵 개발계획을 폐기하고 난 후에,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경제제재를 해제 받기로 약속한 비핵화 방식이었다. 북한이 이 모델을 배척하는 이유는, 첫째, 카다피는 핵 개발을 위한 장비를 선박에 실어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 기지로 보냈지만 미영 양국은 경제제재 조치를 바로 해제해 주지 않았고, 둘째, 리비아에서 미국으로 핵 개발 장비 마지막 부분 철수를 완료한 지 2년 후인 2011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지원하는 반군에 의해 카다피가 피살됐다는 사실 때문이다. 

사실 북한과 볼턴 보좌관의 악연은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됐다. 그는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군축·국제안보담당 차관이던 2003년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폭군 같은 독재자’라고 비난했고, 북한은 그를 ‘인간쓰레기, 피에 주린 흡혈귀’라고 맞받아쳤다. 또한 볼턴 보좌관은 국무부 차관이던 2004년 리비아의 핵 관련 장비를 오크리지로 옮기는 일을 주도했으며, 지난 3월 국가안보보좌관에 임명되기 직전까지도 대북 선제공격을 주장했으며, 트럼프 행정부에 들어와서도 “북한은 리비아식 모델을 따라야 한다”고 계속 주장해왔다. 

북한이 생각하기엔 카다피는 선 비핵화, 후 보상 방식의 협상에 서명했다가 경제적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김 제1부상은 “트럼프 행정부가 조미관계개선을 위한 진정성을 가지고 조미수뇌회담에 나오는 경우 우리의 응당한 호응을 받게 될 것이지만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든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조미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성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사실 볼턴 보좌관은 수차례에 걸쳐 리비아식 모델을 강조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별다른 방식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 제1부상의 돌발 발언 이후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하기 위해 ‘리비아식 모델’이 아닌 ‘트럼프식 모델’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트럼프식 모델이 어떤 방식인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미흡한 것으로 보아 트럼프 대통령이 리비아식 모델과 차별화된 자기 방식을 아직 정립하지 못한 것 같다. 

북한은 아직도 카다피의 비극적 운명을 교훈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따라서 리비아식 모델만을 고집해 온 볼턴 보좌관을 백악관 논의에서 2선으로 밀어낼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는 22일 열리는 한미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에 대한 자신의 모델이 어떤 것인지를 밝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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