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관제묘고(關帝廟考)
[고전 속 정치이야기] 관제묘고(關帝廟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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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산동 라오산의 백운동 서쪽 입구를 묘령구(廟岭口)라고 한다. 이곳에서 관제묘로 들어간다. 앙구만이 보이는 이곳에 관광객들을 위한 전망대가 있다. 앙구만의 서남쪽 우거진 숲 속에는 맑은 샘물이 솟아난다. 그 뒤에 잘 보존된 관제묘가 있다. 관제묘는 중국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만력22년(1594), 황제는 태평궁 도사 장통원(張通元)의 건의로 관우를 협천호국충의대제(協天護國忠義大帝)로 봉했다. 이 무렵 말기로 접어든 명왕조는 서북에서 보바이의 난을 간신히 진압했지만, 조선을 침입한 일본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조선의 야사에는 만력제를 유비, 조선의 선조를 장비의 화신이라 했다. 사신으로부터 그 말을 들은 황제는 과연 조선왕이 장비의 화신인지 확인하려고 했다. 이덕형(李德馨)은 선조에게 커다란 독에 들어가 큰 소리로 울면서 동생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구해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라고 권했다. 독안에서 울리는 큰소리는 과연 장비의 우렁찬 목소리와 같았다. 그렇다면 관우는 누구일까? 조선에 출병한 이여송(李如松)이다. 이후로 관우는 조선의 수호신이 됐다. 지금도 동대문 밖 동묘에는 관우가 눈을 부릅뜨고 있다.

충의의 대명사인 관우와 같은 인물이 얼마나 그리웠든지, 만력제는 11년 후에 다시 삼계복마대제(三界伏魔大帝), 신위진원천존관성제군(神威鎭遠天尊關聖帝君)로 봉했다. 장통원은 즉시 노산에 관제묘를 세웠다. 화산파에  속한 그는 관제묘를 태평궁의 배속했다. 청의 광서12년(1886), 관제묘는 태평궁에서 독립했다. 당시 관제묘는 태평궁 북쪽 일대를 보유했다. 관제묘의 주요 자재는 유백색의 화강암을 장방형으로 깎은 것이다. 산문을 통과하면 중당이 있고, 담장을 돌면 마당이 나온다. 관제묘에는 26간의 방이 있다. 정면 대전에는 높이 2미터인 관제신상이 있고, 좌우에는 비슷한 높이의 관평(關平)과 주창(周倉)의 신상이 있다. 사방의 벽에는 관우와 관련된 도원결의(桃園結義), 천리주단기(千里走單騎), 화용도(華容道), 단도부회(單刀赴會) 등 고사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다. 관제신상의 양쪽 기둥에는 형현덕제익덕덕형덕제(兄玄德弟翼德德兄德弟)와 사와룡우자룡룡사룡우(師臥龍友子龍龍師龍友)라는 대련이 있다. 만화가 고우영(高羽榮) 선생은 제갈량이 관우를 은근히 견제했다고 했지만, 중국인들은 관우가 제갈량을 스승으로 여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국인들은 관우를 맹장이자 대유(大儒)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그가 회계에 밝았다는 이유로 재신(財神)으로 떠받든다. 관우가 회계에 밝았기 때문에 재신으로 추앙받는다는 말은 청도에 사는 내 친구 스프링의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관우에게 향을 피우며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빈다. 묘원에 심은 꽃과 나무에서는 철따라 향기가 풍긴다. 바깥에는 커다란 노송과 산추(山楸)가 푸른 대나무 숲과 어울려 고요한 도교사원의 정취를 느끼게 한다. 관제묘에서 서쪽을 보면 수려한 산봉우리가 기이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다. 아름답고 웅장한 장군고(將軍崓), 시원하게 우뚝 솟은 중심고(中心崓), 날카롭게 깎아놓은 송곳과 같은 추자고(錐子崓)와 벽자석(壁子石), 철차산(鐵叉山), 노요자와(老鷂子窩) 등등이다. 동쪽에는 푸른 바다에 갈매기가 나는 장면이 보인다. 이곳에서 관우가 바다 건너 우리를 보고 있다. 묘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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