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이는 거리를 단축시키고, 삶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발전은 거듭되고 있다. 과거에도 교통과 통신은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관련해 옛 선조들이 누린 교통과 통신 문화는 어땠는지 알아봤다.

우정총국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7
우정총국 (출처: 문화재청)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7

개인도 요금만 지불하면 이용

갑신정변으로 우편제도 중지

1895년 재시작... 우체부 등

◆우편제도 언제부터 시작됐나

우리나라에서 처음 우편제도가 시작된 것은 1884년부터다. 개화파 홍영식은 1881년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 문물을 시찰하고, 1883년 보빙부사로 미국에 다녀왔다. 이후 선진국의 우정사업이 발달한 것을 임금에게 전했고, 이에 따라 우편제도가 시작됐다. 우편업무를 맡는 관청으로는 우정총국과 인천 분국이 있었다.

하지만 우편 업무가 개시된 지 안 된 같은 해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홍영식 등은 숙청당했다. 결국 우정총국은 폐지되고 우편제도도 중지되고 말았다.

우정총국에서는 다섯 종의 우표를 발행했는데, 당시 화폐 단위인 문(文)으로 불렸으며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이 있었다. 태극이 주도안이었고, 당초문양으로 장식을 했다. 그래서 최초의 우표는 ‘문위우표’라고 했다. 이 문위우표는 세계적인 희귀종으로 동양권에서는 최고가로 평가되고 있다. 사용기간이 20여일 밖에 안 됐기 때문이다.

또 시대적으로 양반위주의 사회구조이기에 이 같은 새로운 제도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서민이 타인에게 소식을 전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상이었다.

이렇다보니 당시 서민들 사이에서는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과거에는 개인적인 일로 소식을 전하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마저도 지나가는 인편을 통해 소식을 전하는 게 다였다. 또 인편을 통해 소식을 보내도 금방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어지간히 급한 일이 아니면 연락을 하지 않았고, 소식이 없으면 잘 지내려니 생각했다. 이에 사람들은 급한 전보가 오거나 하면 불길한 소식인 줄 알고 가슴을 쓸었다고 한다.

우편엽서. 앞면에는 아랍인과 함께 갓을 쓰고 붉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하인으로부터 물건을 받는 그림이 인쇄됨. 앞면 좌측 하단에 우정총국에서 발행한 최초의 문위우표(文位郵票)의 도안이 있으며, 우측 상단에 태극기가 인쇄됨. 그림 아래에 'LA POSTE EN COREE'가 인쇄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7
우편엽서. 앞면에는 아랍인과 함께 갓을 쓰고 붉은색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이 하인으로부터 물건을 받는 그림이 인쇄됨. 앞면 좌측 하단에 우정총국에서 발행한 최초의 문위우표(文位郵票)의 도안이 있으며, 우측 상단에 태극기가 인쇄됨. 그림 아래에 'LA POSTE EN COREE'가 인쇄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17

◆우편 업무 재개

중단됐던 우편 제도는 1895년 다시 시작됐다. 1900년대에는 만국 우편 연합에 정식 가입해 외국 우편도 시작하게 됐다. 우편물을 전해 주는 우체부가 등장한 것도 1895년 우편 업무가 재개된 때부터다.

최초의 엽서는 우편업무가 재개된 된 지 5년 후였다. 간편한 통신수단으로 알려진 엽서의 사용이 늦은 것은 대중의 인기가 적어서였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써서 서신으로 보내진 것과 달리, 엽서는 조그만 종이 한 장에 적어야 했었다. 이는 채신없게 보여 한국인의 정서에는 맞지 않았다고 한다.

이 당시 기록된 소설에 따르면 우체부의 모습은 ‘우자가 박힌 벙거지를 쓰고 감장 홀태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가죽 주머니를 메고’라고 적혀있다. 이에 우체부를 ‘벙거지꾼’이라고 불렀다. 또 우편 군사, 체전부 등으로 불리기도 했고 ‘체대감’이라는 존칭이 사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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