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순희 충남동부보훈지청장

독립기념관에서 5분여 거리에 석오 이동녕선생 생가와 기념관이 있다. 나즈막한 뒷동산과 잘 어울리는 아담한 생가 앞에는 선생의 휘호석(山溜穿石)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휘호석 뒷면에는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으로 열심히 정성을 다하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는 의미’라고 돼 있다. 조국독립을 이루기 위해 살다 가신 선생의 삶을 잘 대변하는 것 같다. 마당에는 꿈에도 그리던 광복된 조국의 고향 집에 오셔서 즐거운 듯 회상에 잠긴 듯 벤치에 앉아계신 동상이 있다.

생가 안내판을 중심으로 선생의 생애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869년 9월 2일, 천안 목천 여기 생가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봉소(鳳所), 호(號)는 석오(石吾)다.

어려서 한문을 수학하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4년 제1차 한일협약 체결로 국권이 위협받자 상동청년회에 가입해 애국계몽운동에 투신했다.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상설 등과 북간도 용정에 망명해 서전의숙을 설립했다. 1907년 귀국해 안창호, 김구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했고 1910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이시영, 이강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이 됐고, 그 후 국무총리, 국무위원 주석의 일을 함께 보았다. 1928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이사장이 됐으며, 1935년 한국국민당 당수로 활약했다. 1940년 중국 사천성에서 병으로 사망해 안장됐다가 1948년 효창공원으로 옮겼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선생은 조국이 역사의 격랑에 휘말리던 시기에 태어나 숨을 거둔 순간까지 국권수호와 조국독립이라는 대의(大義)에 따라 살다가신 분이다.

사마천의 사기열전에는 사람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분류한 구절이 있다. ‘탐욕스러운 자는 재물을 추구하다 목숨을 잃고, 절의를 중시하는 자는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과시하기 좋아하는 자는 권세를 추구하다 목숨을 잃고, 먹고살기 힘든 서민은 그날그날 살기 위해 이익에 매달린다.’

이에 따르면 선생은 ‘이름을 얻기 위해 목숨을 바친 절의를 중시하는 자’에 해당될까? 그러나 선생의 시대는 그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생이 태어날 무렵 일본은 명치유신에 성공하고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동아시아에 대한 패권을 거머쥔 후 1905년 을사늑약을 거쳐 급기야 1910년 대한제국을 세계역사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후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에서 승리하고 동아시아로, 태평양으로 전선을 확대해갔다. 이러한 일본을 상대로 조국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살아가신 선생의 지고한 삶의 자세는 범인으로서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과 정신이 일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매우 안타깝다. 생가지 내에 기념관이 있지만, 너무 외지고 협소해 찾는 사람도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내년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된다. 우리 지청에서는 올 7월경에 대학생 기자단을 구성해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임시정부 유적지를 탐방할 계획이며, 내년에는 선생의 생애와 공적을 다양한 방법으로 홍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앞서 말한 사마천의 사기열전에 ‘백이와 숙제’같은 현인도 공자의 칭찬이 있은 후에 그 명성이 더욱 두드러졌고, 공자의 제자 중 학문에 독실했던 안연도 공자의 칭찬 이후 천리마의 꼬리에 붙어 1000리를 가는 부기천리(附驥千里)처럼 그 덕행이 더욱 뚜렷해졌다는 일화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계기로 조국에 대한 절의에 일생을 바친 선생의 삶과 공적을 크게 조명해 그 명성을 드러낼 수 있는 천리마가 나타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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