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규 대중문화평론가

 

“네가 진다면 수많은 인도 여자아이들이 지는 거야.”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 영화 속 대사일까. 오랜만에 영화다운 영화를 봤다. 어벤져스보다 긴 영화, 무려 161분이라는 시간 때문에 영화를 보기 전 “무슨 영화가 그리 길어?”라고 했던 필자는 그 긴 시간이 전혀 지루하거나 아깝지 않았다. 왜 할리우드가 인도를 점령하지 못했을까를 대변하고 보증하는 작품이 바로 영화 ‘당갈’이다. 인도 영화시장에서는 매년 약 1000편의 영화들이 제작된다. 전 세계 영화 제작편수로 본다면, 할리우드에 이어 제2위 국가일 만큼 인도인들은 영화를 사랑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인도영화의 대부분은 건조한 스토리보다 가족사, 인생사, 남녀의 연애담 등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며, 영화 속 노래, 음악, 춤, 액션 등 살아있는 복합적인 요소들을 적절히 분배하고 표현한다는 것이다. 영화 당갈 역시 스토리와 연계되는 의미 있는 노래, 축제적 음율과 음악성은 화면 구성의 핵심이자 이미지의 골격인 긍정의 힘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영화는 아버지와 자녀와의 갈등, 가족의 가치, 자식에 대한 무한 사랑, 인생의 목표 등을 내세우며 짜임새 있는 플롯을 만들어간다. 당갈은 이기적인 경쟁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진솔하게 풀어낸 서사를 통해 따뜻한 위로와 묵직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당갈이 현재 주목받는 이유는 단순한 가족의 가치와 어색한 부녀가 화합하는 이야기, 남성중심의 서사와 권위적인 사회적 메시지만 전달한 것이 아니라 오랜 인도 역사 속에 무시당하고 버림받아졌던 여성의 인권, 인도 스포츠에서 여성의 낮은 참여율, 성차별 관행 등 젠더 이슈도 함께 다뤄졌다.

현재 인도는 카스트제도가 남아있는 데다 남녀 차별도 심각한 편이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7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의 남녀평등지수는 142개국 중 114위로 하위권이다. 인도 여성의 노동 참여율은 27%로, 미국의 56%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 동안 인도의 많은 부모들은 전통적으로 아들을 선호했다. 밖에 나가 일을 해 돈을 벌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은 그저 재정적 부담을 주는 존재로만 간주됐다. 영화 당갈에서도 이 대목이 정확히 등장한다. 하지만 지금은 경제 성장에 힘입어 인도 여성들이 교육, 인터넷 등을 통해 재정적 자율성과 더불어 사회진출이 확대되고 있다.

인도의 ‘여성 레슬러’ 자매의 실화를 다룬 영화 당갈은 레슬링을 소재로 낯설고 드문 소수의 여성 스포츠인들을 다루고 있다. 당갈은 고립되고 고정관념으로 피해를 보고 있는 인도 여성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틀에 박힌 남성중심의 인도사회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실력 있는 레슬러였으나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운동을 포기하고 생업에 뛰어 든 아버지 마하바르 싱 포갓은 자신이 못 이룬 금메달의 꿈을 아들을 낳아 이루고자 한다. 마치 오래 전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을 통해 대리로 이루려했던 한국 아버지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자식의 성공이 곧 내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핏줄 의식과 가부장적 문화와 남존여비 사상, 부계사회 등 인도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도 니테쉬 티와리 감독은 영화를 통해 꼬집고 있다. 연이어 딸만 넷을 낳은 아버지는 첫째 딸 기타와 둘째 딸 바비타의 재능을 발견하고, 딸들에게 국제대회 금메달을 목표로 레슬링을 훈련시킨다. 티와리 감독은 레슬러로 성공한 두 딸을 통해 여성도 주인공이 될 수 있으며 성역할의 불평등을 깨드려야 한다는 영상예술의 메시지를 통해 직접적으로 인도사회를 비판한다.

인도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줬던 당갈은 젠더 이슈를 크게 다뤘다. 일찍부터 여성인권에 관심을 두고 여성운동 및 양성평등의 개념을 정립해온 서구사회와는 달리, 인도사회에서 젠더이슈는 지금도 풀지 못한 큰 숙제로 남아있다.

“너의 승리는 너만의 것이 아니야. 너는 여자를 하찮게 보는 모든 사람들과 싸우는 거야. 네가 진다면 수많은 인도 여자아이들이 지는 거야.”

이 대사 하나는 현재 인도사회가 직면한 젠더 권력에서 비롯된 기득권을 비판하고 보다 넓은 시각에서 젠더 문화의 구조와 잘못된 관행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인도여성들의 큰 염원이 담겨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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