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이는 거리를 단축시키고, 삶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발전은 거듭되고 있다. 과거에도 교통과 통신은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관련해 옛 선조들이 누린 교통과 통신 문화는 어땠는지 알아봤다.

남산 봉수대 ⓒ천지일보(뉴스천지)
남산 봉수대 ⓒ천지일보(뉴스천지)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

산 많은 우리 국토에 적합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과거에는 멀리 떨어진 곳에 연락할 때 연기를 피워 올리는 방법을 사용했다. 바로 ‘봉수’다. 봉수는 보통 국가의 안보 상태와 직결돼 외군의 침략을 막거나 미리 알리는 데 사용했으며, 당시의 중요한 통신망 역할을 했다.

봉수는 ‘봉(烽: 횃불)’과 ‘수(燧: 연기)’로 구성돼 있다. 봉(烽)은 야간에 횃불을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는 형태였다. 반면 수(燧)는 낮에 연기를 올려 통신을 하는 형태였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지형이기에 봉수는 적합한 통신수단이었다.

봉수는 위급한 상황에 따라 피어 올린 연기와 불의 수가 달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하루에 한 번 정해진 시간에 올려 안전하다는 것을 전했다. 그 외의 시간에 봉화가 피어오르는 것은 전쟁이 일어났다는 증거였다. 보통 적이 출현하면 두 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개, 국경을 돌파하면 네 개, 적과 교전이 이뤄지면 다섯 개를 피어오르게 했다.

◆역사 속 봉수제도

봉수제도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먼 옛날부터 사용됐다. 중국에서는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A.D. 25~27)에 상당히 정비된 봉수제도를 갖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 온조왕 10년에 왕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봉현(烽峴)에서 말갈족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백제 의자왕20년(660)에는 나·당연합군과 전투를 벌인 후 왜에 들어가 방어를 위한 성곽과 봉수를 664년부터 설치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봉수제는 고려시대에도 사용했다. 이어 전국적인 봉수제도를 갖추게 된 것은 조선 세종대왕 때부터다. 세종대왕은 기존 중국 및 고려 시대 때 운영됐던 봉수제도를 참고해 봉수제를 크게 정비하고 발전시켰다.

1770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는 전국 봉수의 수가 673개로 기록돼 있다. 봉수는 20리에서 40리 정도 간격을 두고 주변에서 잘 보이는 산봉우리에 설치했다. 봉수의 전달 방식은 국경의 변방에서부터 내륙을 거쳐 서울 남산에 이르는 중앙집중식이었으나 때로는 중앙에서 국경지역으로 내보내는 분산 식으로도 운영됐다.

◆전달 소요시간 지연되기도

그러나 봉수제는 신속을 기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했다. 원래 봉수는 동서남북의 어느 곳에 위치한 봉수대에서 올린 봉화이든 간에 아침에서 저녁의 약 12시간이면 서울에 도달함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봉수군의 태만과 봉수대의 관리 소홀로 불통되거나 전달 소요시간이 너무 지연되기도 했다.

중종 때 기록에 보면 “봉수의 근면하지 못함을 염려해 몰래 시험해 본 결과 변방으로부터 5~6일만에 서울에 도달했는데 지금은 1개월이 걸려도 통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돼 있다. 또 숙종 때는 “곽산(郭山, 평안북도 정주 지역의 옛 지명)에서 올린 봉화가 즉시 서울에 도달해야 되는데 하룻밤을 지나서 겨우 20리 떨어진 곳에 닿았다”고 돼 있다. 이는 봉수의 기능이 잘 지켜지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봉수제 강화 위한 규정 제정

이에 봉수제를 강화하고 신속하게 하기 위한 여러 규정이 제정됐다. 근면한 봉수군은 승진 표창을 했고, 게을리 하거나 거짓 봉화·방화를 했을 때, 관계관원이 감시 감독을 게을리 할 때는 엄벌로 다스리도록 했다.

또한 봉수대에는 표주(標主:남에게 빚을 쓰고 수표를 써낸 사람)를 세워 경계를 정하고 100보 내에서 일어난 범죄는 병조에서, 100보 외에는 당해 진영에서 단속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봉수는 국가의 안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전쟁이 발생했을 때에는 정작 제구실을 하지 못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남산 북쪽 산허리 봉수대를 파손하고 왜장대를 쌓았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봉수는 임진왜란 이후 그 기능이 상실됐다.

이후 봉수는 신식우편과 전기통신 등의 근대적인 통신 방식이 도입됨에 따라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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