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길 안내·호위·시중·연희 꼭두 (사진제공: 꼭두박물관)

이생에서 못 핀 평민 염원 담아

[천지일보=박선혜 기자] 조선시대 평민들은 이생에서 신분 차별로 누리지 못한 호사를 죽어서 가는 길에 한껏 누렸다. 양반들의 상여보다 평민들의 상여에 임금의 상징인 용과 봉황 ‘꼭두(나무조각)’가 많은 것을 보아 죽음 앞에선 반상의 차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꼭두는 사람이나 동물 형상을 한 전통 목조조각이지만 상여를 장식한 부속물로 더 많이 알려졌다.

상여를 지켰던 꼭두는 망자의 영혼을 위로했다. 이 세상을 떠난 슬픔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을 달래주는 존재였다. 망자를 매장지까지 운반하는 상여 둘레에 둘려 인물상, 동ㆍ식물상 등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하고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꼭두는 목인 또는 목우라고 불렸다. 꼭두새벽, 꼭두머리 등과 같이 꼭두라는 말은 제일 빠른 시간이나 제일 윗부분을 일컫는 것으로 이쪽과 저쪽 사이의 경계를 말한다.

인물형 꼭두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되는데 망자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길 안내 꼭두’, 망자가 나쁜 영향을 받지 않게 지켜주는 ‘호위 꼭두’, 망자의 수발을 들어주는 ‘시중 꼭두’, 불안하고 슬픈 망자를 달래주며 재미를 주는 ‘연희 꼭두’로 나뉜다.

특히 길 안내 꼭두는 동물상인 용·봉황 조각과 함께 쓰여 망자가 가는 길을 안내했다. 용은 안전과 권위를 상징했으며 봉황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해 상여에 많이 쓰였다.

목각 인물상은 경상도 지역의 상여에 많이 부착됐다. 1856년 만석군 최필주가 죽었을 때 썼던 상여는 목조각의 백미로 꼽는다.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230호로 지정돼 국립민속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는데 누각식 건물 형태로 매우 독특한 양식이다.

최씨 고령댁 상여 3층 평판 전후좌우에는 사람이 탄 십이지신상을 배치했는데 다른 상여에서는 볼 수 없다. 이 십이지신상은 망자를 안전하게 저승으로 인도하고자 각 방위를 지키기 위해 배치됐다.

꼭두와 상여를 만든 사람은 이름 없는 장인들이었다. 장례가 끝나면 상여와 부속물을 태워버리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은 상여·꼭두는 19세기나 20세기 초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꼭두는 조선시대 및 일제시대의 민중적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자신들의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민중의 삶과 생각을 추적하는 데 있어 상여의 꼭두는 무신도, 불화, 불조각상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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