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호익 동북아공동체ICT포럼회장/한국디지털융합진흥원장

 

오는 7월 1일부터 300인 이상 사업장은 ‘주 68시간 근로시간’을 단축해 법정근로 ‘주 52시간 근무’ 시대가 열린다. 근로기준법의 개정 취지는 ‘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즉, 장시간 근로문제를 해결하고 휴일을 확대해 국민 삶을 나아지게 하는 동시에 고용 확대 등 긍정적인 효과를 내자는 것이다. 그러나 업계와 전문가들은 근로시간 단축은 업종 특성상 근로시간이 길고 근무강도가 높고 이를 유동적으로 조정하기 힘든 기업일수록 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심지어 기업의 존폐, 산업 생태계의 파괴 우려 등 후폭풍이 클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최근 정부와 산업별 협·단체 공동조사에 따르면 근로시간 단축으로 가장 큰 피해가 우려되는 제조 업종은 뿌리산업과 섬유산업이다. 신제품 개발 직전 근무가 집중되고 근무시간을 특정하기 어려운 연구개발(R&D) 부문, 게임, 소프트웨어(SW)와 정보통신기술(ICT) 서비스업도 영향권이다. 뿌리산업은 주조, 금형, 소성가공, 용접, 표면처리, 열처리 등 제조 공정 기술을 활용한 6대 업종으로, 이들은 최종 제품에 내재돼 제조업의 근간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산업의 뿌리와 같다.

뿌리산업은 주문형 소량 생산위주로 2~4차 협력사이다. 업계 특성상 납기 맞추기와 출혈 단가 경쟁으로 연장·휴일 근무가 불가피하다. 근로시간 단축에 따라 추가 고용이 필요하지만 취업 기피 업종으로 인력 확보가 어렵다. 뿌리산업은 최저임금 인상과 근로시간 단축으로 존폐의 위기에 놓여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근로시간 단축 영향을 분석한 결과 뿌리업체는 납기 준수와 인건비 부담 완화를 위해 자동화 또는 인력 감축으로 대응한다는 계획이지만 일부 업체는 사업장 해외 이전이나 폐업까지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동차 부품, 조선, 일반기계 업종도 근로시간 단축의 영향권에 있다.

SW산업도 정보통신산업의 뿌리산업이다. 게임이나 SW업종, 근무시간 특정이 어려운 R&D, 출장이나 파견 업무가 많은 IT업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게임과 소프트웨어, 시스템통합(SI) 관련 업체는 업종 특성상 보완책이 없다면 생산성에 치명타를 받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제품 개발과 프로젝트 등으로 장시간 근로가 특정 시기에 집중되는 IT업계나 연구개발(R&D) 부문에선 근로시간제가 원칙대로 적용되면 경영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IT서비스산업협회(ITSA)는 ‘IT서비스’를 노동시간 특례 업종으로 지정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연구개발(R&D) 수행 기관과 기업부설연구소 보유 기업 대상으로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탄력근로시간제’의 단위 기간 1년 연장이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효과적 보완책으로 꼽았다.

국내 산업구조상 대기업은 영향이 적지만, 1차·2차 협력사로 갈수록 영향력이 커진다. 근로기준법 개정 후 대기업은 비교적 기민하게 대응책을 마련 중이지만 중소기업은 열악한 경영여건과 인식부족 등으로 사전 대비를 못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피해는 장기적으로 대기업의 제품 품질과 생산능력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미 시행하고 있는 최저임금 인상도 정부는 수입이 늘어나 서민의 삶이 보다 여유로워지고 일자리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일자리가 크게 줄고 폐업을 고민하는 자영업자가 속출하는 등의 역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근로시간 단축도 정부는 시행 이후 실태조사를 거쳐 보완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사후 땜질 처방보다 시행 후 예상되는 업종별 영향과 부작용을 파악해 후속 보완대책을 내놔야 한다.

미국과 유럽이 예외 조항과 특례 업종을 도입해 근로시간 단축을 시행했듯이 우리도 예외 직군 인정과 특례 업종을 재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탄력근로시간의 단위기관 연장, 유연근무제 시간 확대, 자동화 지원 및 인력 양성지원도 확대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합하는 직군과 직업일수록 지적 및 창조적 분야가 많아 제도 시행 유예 등 정책적 고려가 있어야 한다. 삶의 질을 높이고 일과 휴식의 균형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업계 생태계도 고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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