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이는 거리를 단축시키고, 삶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발전은 거듭되고 있다. 과거에도 교통과 통신은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관련해 옛 선조들이 누린 교통과 통신 문화는 어땠는지 알아봤다.

단원 풍속도첩 중 하나인 '장터길', 장터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듯하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6
단원 풍속도첩 중 하나인 '장터길', 장터에서 물건을 다 팔고 돌아가는 길인 듯하다 (출처: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6

삼국시대에 역 50개까지도 설치
중앙과 지방 오가며 보고 전달
`문서 중요도’로 이용 역수 정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배를 이용한 물길에 비하면 육상 교통은 그다지 빨리 발달하지는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국가에서 도로를 정비한 것은 삼국시대부터다. 신라에서 전국의 도로를 수리하고 ‘역참제’를 실시했다.

◆육상 교통의 핵심 ‘역참제’

역참제란 원래 중앙의 명령을 지방에까지 신속히 전달하기 위한 통신체계였다. 그러나 옛사람들은 직접 문서를 들고 전달할 수밖에 없어서 통신체계가 곧 교통체계이기도 했다. 신라 9년 소지왕(487)때 ‘처음으로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소관 부서에 명해 관도(官道)를 수리하게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하지만 일부 기사를 보면 415년경에 이미 역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로 보아 훨씬 이전부터 일부 역이 운영되고 있었고, 487년에 비로소 정식으로 우역제가 실시되고 소관 부서가 정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 문무왕 8년(668) 10월 왕이 욕돌역(褥突驛)에 행차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고구려 지역의 경우 국내성과 평양사이에 11개 역이 있었고 신라 천정군에서 고구려 옛 땅인 책성부(柵城府)까지는 39개의 역이 있었다고 한다. 이로보아 삼국시대에 역 운영이 상당한 수준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고려시대에 관한 문헌에는 교통로를 표현하는 도(道)의 용례가 상당히 나타난다.

특히 고려에서도 역참제를 실시하면서 수도와 전국의 도시들을 연결하는 22개 도로를 정비했다.

고려시대에 역에서 수행하는 업무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면서 보고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문서를 보낼 때는 업무의 급한 정도를 등급을 나눠 속도를 조절했다.

계절에 따라 하루의 운행 거리가 조정되기도 했다. 일출과 일몰 시간을 참작해 하루 동안에 운행하는 역수를 정했다. 2월부터 7월까지 낮이 긴 날에는 3급인 경우 6역, 2급인 경우 5역, 1급인 경우 4역을 통과했다. 만약 거리를 30리(里)로 잡으면 3급인 경우 하루에 180리 정도를 운행했다. 8월부터 낮이 점점 짧아져3역을 통과하도록 하니 1급일 경우 하루에 90리 정도를 운행했다고 한다.

또한 조선 후기에 들어서 상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도로는 점점 더 확대됐다. 보부상들은 상품을 직접 짊어지고 전국을 돌아다니거나 말이나 소에 짐을 실어 운반했다. 이에 따라 기존 도로가 더 커지고 길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김홍도 풍속도 속에 담긴 말탄 선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6
김홍도 풍속도 속에 담긴 말탄 선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5.6

◆역참제 통제 위한 ‘마패 제도’

고려 후기에는 역참제를 더욱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 ‘마패 제도’를 만들었다. 나라에서 필요한 사람에게 증표를 발급하고, 이를 가진 사람은 역에 있는 말을 빌려 사용할 수 있었다.마패는 역에서 말을 쓸 수 있고 지방의 포졸을 동원할 수 있는 증명서였다.

마패 제도는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계승됐다. 이 때문에 암행어사의 상징으로 마패를 떠올리기도 한다. 처음에는 마패를 나무로 만들었으나, 훗날 철이나 구리 등으로 만들었다. 특히 뒷면에는 사용 가능한 말의 수가 1마리부터 5마리까지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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