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라곤 논설실장/시인

 

어느덧 4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때쯤이면 우리 주변 가까이 울타리나 공원, 또는 멀리 산과 들에서도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 자연풍경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별의별 화사한 꽃들이 잔뜩 피어 이를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편안해지는 계절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4월을 잔인한 달이라 기억하고 있는바 아마 그것은 T.S. 엘리엇(1888~1965) 시인의 명작시 ‘황무지(荒蕪地)’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미국계의 시인인 엘리엇이 그의 스승이기도 한 에즈라 파운드를 위해 쓴 이 시 첫 싯구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로 표현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엘리엇 시 ‘황무지’를 보면 앞머리에서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어/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어나게 한다.// 겨울은 차라리 따뜻했었나니./ 망각의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뿌리로 가냘픈 목숨을 이어줬거니…’가 나온다. 이 시는 20세기 전반의 가장 유명한 시라고 평가되고 있다. 당시나 후세의 평론가들은 시평에서 20세기 초의 미국사회에 대한 어두운 국면을 간파한 것이라 했던바, 대표적인 사건이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과 당시 사회 현상에 대한 절망 등 문명에 대한 비판에서 근거하고 있다.

이 시를 처음 접하던 시기에 필자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시절이다. 당시에는 세계의 문예 사조나 작시 배경이 된 미국사회의 환경을 이해하지 못한 채 에즈라 파운드, T.S. 엘리엇 등이 빼어난 시인들이고, 이 시인들의 작품을 좋은 시, 훌륭한 시라 하니까 무턱대고 황무지를 애송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이 시의 상징어가 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 한국사회에서도 어떻게 널리 인용됐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바, 생각해보면 근대한국사에서 4.19혁명 같은 정치적 변환기.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경제적 어두운 그림자로 해서 조명된 것이 아니었을까.

엘리엇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유명 시인이다. 1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황무지’ 등 시를 쓰면서 세계문명에 대해 비판했던 그는 2차 세계대전 중 ‘4개의 4중주(Four Quartets)’라는 시를 발표했고, 이 작품으로 194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하지만 세계 문학인들과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은 노벨문학상 수상작보다 ‘황무지’를 더 잘 알고 있었으니 20세기 전반의 가장 유명한 시로서 지금도 4월이 되면 세계인들은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 읊조리는 것이다. 

이는 4월이 가장 잔인하게 그려질 만큼 그 나라가 처해졌던 상황과 연계되는 이유에서라 하겠다. 예를 들어 우리도 과거 일제식민지를 거쳐 6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사회가 혼돈스러웠고, 얼마나 살기 어려웠던가를 한번 생각해보면 이 시가 시대 상황과 잘 맞아떨어지는 일면이 있다. 시에서 나오는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 마른 뿌리로 가냘픈 목숨을 이어줬거니’ 구절에서는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우리에게도 연상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자유당 말기의 부정부패와 독재에서 분연히 일어선 젊은 학생들의 항쟁과 희생이 오늘날 민주주의를 꽃 피운 라일락이 됐고, 초근목피 생활로 이어가던 어려운 4월 보릿고개 시절이 우리에게 오랫동안 존재했으니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할만 했지만 실상은 그런 연유는 아닐 것이다. 

봄이 완연히 익어가기 전의 4월은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였다. 1950년대나 60년대 초기에는 우리 세대가 경험했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자리 잡은 4.19혁명과 4월 보릿고개가 있었다. 그러다가 민주주의가 진전되고 경제가 성장하면서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면서 우리국민들은 안전욕구에 대한 갈망이 자리 잡았다. 그런 와중에서 몇 년 전 어느 날 아침에 발생한 비극, 세월호 참사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 국가의, 정부의 근본이라는 점을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이 역시 개나리가 피고 라일락 향기가 넘쳐나는 4월에 닥친 참극이었다.  

사실 엘리엇 시인이 ‘황무지’에서 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적 표현은 당시 사회현상에 대한 불평이자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잘 가꿔왔던 인류공생의 질서가 하루아침에 무너져 폐허로 변하는 전쟁 통에서 인간미를 노래했던 시인은 많은 혼돈을 겪었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충격이 그대로 이어지면서 전쟁에도 아랑곳없이 번져나는 이질화되는 문명의 이면을 비판했던 것인데, 시적 내용처럼 4월이란 계절 앞에서 따뜻했던 겨울을 그리면서 대지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들을 망각의 문으로 지워야 할 만큼 그토록 사월은 잔인했을까?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멍에를 덧씌운 시인의 명작 속 4월은 이제 끝자락에 서있다. 우리 역사 흐름의 흔적 속에서도 어둔 그림자로 자리했던 달, 꽃샘추위와 황사현상 등으로 일상생활을 불편하게 했던 4월이 물러서면서 계절의 여왕, 5월이 내일로 바짝 다가왔다.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며 시야를 가리고 사회갈등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현실이지만 이웃들이 함께 그리는 세상이 오월에는 열리기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은 푸르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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