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첫사랑’ 떠나보내다… 실록서도 묻힌 비운의 죽음
영조 ‘첫사랑’ 떠나보내다… 실록서도 묻힌 비운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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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  집옥재에서  열린  ‘왕실문화강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원창애  책임연구원이  강연을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9
지난 25일 집옥재에서 열린 ‘왕실문화강좌’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원창애 책임연구원이 강연을 하고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9

집옥재서 열린 ‘왕실문화강좌’
제문에 남은 슬픈 사랑이야기
소훈 첩지 받고 한달만에 사망
왕세제인 영조 슬픔 극에 달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오호라! 그대는 온순한 성품과 부드럽고 바른 자질을 가지고 양가에서 태어나 이른 나이에 궁궐에 들어왔소.(생략) 성별은 비록 남자와 여자지만, 마음으로는 벗이어서 내 마음을 아는 자가 그대이고 그대 마음을 아는 자가 나였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원창애 책임연구원은 25일 서울 종로구 경복궁 집옥재에서 열린 ‘왕실문화강좌’에서 정빈 이씨에 대한 마음이 담긴 영조가 쓴 제문(祭文, 죽은 사람을 제사 지낼 때 쓰는 글)을 공개했다. 첫사랑인 정빈 이씨를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영조. 제문에 적힌 글은 영조의 그리움이 담겨 있어 오늘날까지도 마음을 울리고 있다.

◆영조와 정빈 이씨의 인연

원 책임연구원의 설명에 따르면, 영조와 정빈 이씨는 모두 1694년(숙종 20)에 태어났다. 정빈 이씨는 8세 때 궁에 들어왔고, 영조는 어려서부터 정빈 이씨를 보았던 듯하다. 정빈 이씨가 언제 연잉군(영조의 어린시절)의 첩이 됐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연잉군은 10세 때인 1703년(숙종29)에 관례를 치르고, 11세 때에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했다. 연잉군은 여러 이유로 1712년(숙종38) 2월에 혼인한 지 9년 만에 궁궐 밖으로 나갔다. 당시 연잉군의 나이는 19세였다. 정빈 이씨는 연잉군의 첫 딸을 1719년(숙종 43)에 낳았다. 첫딸이 태어날 때 연잉군과 정빈이씨는 모두 24살이었다. 이로 보아, 연잉군이 출합할 때 정빈 이씨도 함께 궁궐을 나가 장의동에 따로 집을 마련하고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잉군은 1721년 9월 왕세제(왕위를 이어받을 왕의 아우)로 책봉됐다. 정빈 이씨는 10월 3일 왕세제의 첩실로서 소훈에 봉작됐다. 하지만 정빈 이씨는 소훈 첩지를 받고 한 달 남짓 지난 11월 16일에 갑작스레 사망했다.

서울  종로구  경복궁  집옥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9
서울 종로구 경복궁 집옥재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9

◆정빈 이씨의 석연치 않은 죽음

원 책임연구원은 “정빈 이씨에게는 지병이 있던 게 아니었다”며 “16일 아침까지 멀쩡했던 정빈 이씨는 갑작스레 병으로 그날 저녁 장의동 사저로 옮겨갔는데 그곳에서 사망했다”고 말했다. 정빈 이씨가 갑작스레 죽자 왕세제였던 영조의 슬픔은 극에 달했다.

영조가 1721년(경종1) 11월 19일에 지은 제문에는 이 같은 그의 감정이 표현돼 있다.

‘만약 오늘의 큰 한 일을 알았다면 대략 심회를 터놓고 전하께 교체해 달라고 아뢰었을 것인데 이것은 진실로 몽매하여 마음과 같을 수 없으니 이 또한 내 평생의 한입니다. 오호라! 애통하도다.’

이 대목에서 ‘교체해 달라’는 것은 ‘내가 왕세제가 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을 말한 것으로, 애초 자신이 왕세제가 되지 않았다면 정빈 이씨가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마음이 담긴 듯 보인다.

하지만 정빈 이씨의 죽음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원 책임연구원은 “실록으로는 정빈 이씨의 죽음에 대해 무엇이라 판단할 수 없다”라며 “하지만 영조가 쓴 두 제문에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제문에 보면 ‘매번 스스로 두려워하며 갈수록 불편해 하더니 결국에는 고질병이 되어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입니까?’라고 씌어 있는데 이에 대해 원 책임연구원은 “고질병이 됐다는 표현은 대개 궁중에 들어와서 압박이나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이지 실제로 고질병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아침에 멀쩡했는데 저녁에 갑자기 죽었다. 젖먹이가 나중에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보면 내가 나중에 뭐라고 답해야 하나’라는 문구를 보면 정빈 이씨의 죽음에 뭐가 있었구나 라는 것을 떨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정빈 이씨의 죽음에 대한 실체는 다음 해인 1722년(경종2) 목호룡의 고변에서 독살로 드러났지만, 소론과 노론의 상반된 평가로 사실 관계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자녀에 대한 사랑

영조와 정빈 이씨 사이에서는 1남 2녀의 자녀가 있었다. 영조는 정빈 이씨의 소생들에 대해서 매우 각별했다. 첫딸인 향염 화억공주의 지문을 지었을 뿐 아니라 봉작까지 추증했다.

효장세자가 사망할 때에도 그의 얼굴을 아들에게 갖다 대며 아들을 부르자, 세자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응답하며 눈물을 흘려 뺨을 적셨다고 적혀 있다. 화순옹주가 남편의 죽음으로 곡기를 끊었다고 하자 딸의 집으로 달려가는 등 따뜻한 부정을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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