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들의 교통·통신] ①강, 나룻배에 길 내어주다
[선조들의 교통·통신] ①강, 나룻배에 길 내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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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과 통신이 빠르게 발전하는 시대다. 이는 거리를 단축시키고, 삶도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나날이 새로운 것이 등장하면서 발전은 거듭되고 있다. 과거에도 교통과 통신은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와 관련해 옛 선조들이 누린 교통과 통신 문화는 어땠는지 알아봤다.

대동강 나룻터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6
대동강 나룻터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6

우리나라 국토의 70%는 산

지형 험해 배 타고 이동해

1900년대 초까지 중요 교통수단

마포 등 나루터 주위에서는
각종 젓갈과 소금, 해산물 팔아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과거에는 큰 강이나 사람이 직접 건너지 못하는 깊은 냇물이 있는 곳에 보통 ‘나룻배’가 있었다. 나룻배는 나루에서 쓰이는 배를 말하며, 조선시대에는 국가에서 나룻배를 관리했다. 책임자를 ‘도승’이라고 했고 그 밑으로 각 급 진리(津吏: 나루터를 관장하는 향리)와 나룻배를 배치했다.

◆지형적으로 물길 발달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지형 특성에 따라 물길이 발달했다. 우리나라 국토의 70%는 산으로 돼 있을 정도로 지형이 험했다. 곳곳에는 하천이 있어 길을 내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길을 내더라도 산이 가로막고 있어서 빙 돌아가거나 힘겹게 고갯길을 넘어야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배를 타고 물을 따라 움직이게 됐고, 걸어 다닐 때도 물길 옆으로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나룻배는 교량이 발달하기 전인 1900년대 초까지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물을 만나면 얕은 곳은 바지를 걷고 건널 수 있었지만 깊은 곳은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그래서 길을 이어주는 강가나 하천가에는 나루터가 있었다. 이곳을 통해 길이 계속 연결하도록 했다.

나루터는 규모에 따라 ‘진(津)’ 또는 ‘도(渡)’라고 했다. 이에 배치된 나룻배를 진선(津船) 또는 도선(渡船)이라고 불렀다. 특히 큰 강 하구나 바다 항구에는 ‘포(浦)’를 많이 썼다. 예컨대 서울의 마포, 평안도의 진남포, 경기도의 제물포, 전라도의 줄포·목포, 강원도의 경포, 함경도의 광포 등이 있다. 진이 들어간 지명으로는 경상도의 삼랑진, 강원도 북부 동해안의 안인진·화진·주문진, 함경도의 어대진·청진 등이 있다.

또한 한강에 있는 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에는 군사들을 주둔시키는 ‘진’을 설치했다. 노량진이나 양화진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한문으로 굳이 ‘진·포·도’라고 하지 않고 강인 경우에는 ‘나루’라고 통용하기도 했는데, 서울 한강의 광나루·동작나루·송파나루·양화나루·노량나루 등이 이에 속한다.

◆나루로 오간 나룻배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서적에 따르면, 1894년 4~5월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여행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가 기록한 글 안에는 ‘한강에는 하루 평균 75척의 정크선이 물길을 오르내렸고 정부가 운영하는 나룻배는 47척이었다’고 돼 있다. 1920년대까지도 광나루와 한강나루, 삼전도에 각각 3척, 송파나루에 5척 등 14척의 나룻배가 있었다. 한강나루는 관리와 일반 여행자들이 많이 이용했고, 삼전도는 우마와 상인, 송파나루는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한강의 도선은 뱃전이 얕고 평평한 형태의 나룻배로, 승객 40여명과 우마 2~3필이 탈 수 있었다. 오늘날의 서울 광장동 광진교 부근에 있던 광나루는 예나 지금이나 광주와 연결되고 멀리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지나 동해안으로 향하는 요충의

도선장(폭이 좁거나 수심이 얕은 하천 등 건너기 쉬운 교통상의 요점)이었다. 강원도 쪽에서 내려온 뗏목들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마포나루터로 옮겨지고는 했다.

송파나루의 경우, 1925년 을축년 대 홍수로 마을이 잠기기 이전에 한강 남안의 송파리로 가려면 뚝섬나루에서 나룻배를 타거나 자양동에서 잠실도를 건너 온 뒤 다시 잠실도에서 송파진까지 나룻배로 건너왔다.

이 길은 많은 사람이 이용했고, 300여호의 ‘도진취락(나룻배가 발착하는 도선장을 중심으로 발달한 취락)’이 있었다. 한강나루는 용인과 충주로 통하는 대로의 요충으로 조선후기에 진선이 15척이나 있었다.

마포나루는 오늘날의 마포대교 북쪽 인터체인지 자리에 있었다. 강 건너의 여의도를 지나 시흥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나룻배는 사선이 많았다. 마포는 특히 새우젓을 비롯해 각종 젓갈과 소금, 해산물의 집산지로 유명했다. 1889년 이후 외국의 범선이 들어와 무역항으로서도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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