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한국영화계의 거장으로 일컬어졌던 고(故) 신상옥 감독에겐 평생의 꿈이 있었다. 바로 대륙을 제패했던 몽골제국의 영웅 칭기즈칸을 영화화 하는 것이었다. 신 감독은 미국 헐리웃에 있을 때도 이 소재를 영화화하려고 노력했다. 

2000년대 초 신 감독이 귀국해 재기를 준비하는 동안에도 꿈을 버리지 못했다. 필자가 알기로는 여러 영화제작자들과도 접촉하며 호소했던 것 같다. 당시 신 감독은 70대 후반의 나이였다. 40살을 갓 넘어도 노장이라고 폄하해 버리는 한국영화계의 정서로는 신 감독의 열정은 외로운 외침이었다. 

필자가 신 감독을 만난 시기도 이즈음이었다. 신 감독은 당시 시나리오 ‘모라와칸’이라는 작품에 관심이 컸다. ‘모라와칸’은 고구려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의 전투를 모티브로 하면서 말갈(靺鞨) 전사 3천명이 생매장당한 사건을 스토리화 한 것이었다. 

이 미증유의 비극적 사건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돼 있다. 왜 당나라는 말갈 전사 3천명을 생매장 한 것일까. 작가는 이 사건을 토대로 고구려의 일원이며 별종(別種)으로 기록되고 있는 말갈족의 처절한 역사와 문화, 삶을 임팩트하게 재현했다.  

신 감독은 필자와 자주 서울의 모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고구려 역사에 대해 토론했다. 당시 이 자리에는 부인인 여배우 최은희 여사가 동석했다. 만년에 미국에서 귀국해 재기를 준비하는 부부의 모습은 매우 다정해 보였다.

모라와칸의 준비는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이 있기 전이었다. 한국 영화제작에 펀드를 대주었던 유명한 회사는 시나리오를 보고 매우 흡족해 했다. 임팩트한 소재가 흥행적인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더 관심을 보인 것은 이 시나리오가 미국의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아론 소킨(미국영화 ‘A FEW GOOD MAN’ 작가)에 의해 각색이 되고 미국 상영 진출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신 감독은 충무로에서 있은 자신의 핸드페인팅 행사에 다녀온 후 매우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신 감독이 행사장에서 투자사 대표를 만났는데 예우가 냉랭했다는 것이었다. 노감독의 얼굴에선 실망감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그 후 투자사는 모라와칸과 경쟁했던 다른 사극에 투자를 결정했다. 나중 탈락 이유를 들었는데 선정된 작품의 감독이 ‘망하더라도 같이 가야 할 분’이라는 것이었다. 한국영화계의 고질적인 정실의 작용이었다. 

신 감독은 한국에서 자금을 마련해 30분짜리 예고편을 제작해 헐리웃에 보내면 150억~200억원의 제작비를 지원 받을 수 있는데 하며 탄식했다. 당시 한국영화 시장에서 이처럼 많은 제작비를 마련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얼마 후 신 감독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칭기즈칸을 대신한 ‘모라와칸’ 프로젝트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은 것이었다. 그 후 모라와칸과 경쟁했던 사극은 상영됐으나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다. 1백여억원의 적자를 보고 투자사가 지금까지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당시 ‘모라와칸’이 제작 상영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를 본 영화 관객들은 고구려가 연 1백만 이상의 대군이 참전한 당나라와의 안시성 전투에서 승리한 쾌거를 가슴속에 새겼을 게다. 제작사는 엄청난 흥행을 이루었을지 모른다. 신 감독도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며, 모라와칸은 감독의 기념비적 유작이 됐을 게다.    

며칠 전 생전의 신 감독을 곁에서 지켜 주었던 여배우 최은희씨도 9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하늘에서 홀로 있는 부군 곁으로 따라 간 것이다. 인생의 허무함을 더 한층 절감시켜준다. 그녀는 한국영화계의 산 역사이자, 영원히 기억될 아름다운 배우였다. 

한국전쟁의 와중을 겪으며 북한에 납북돼 탈출하기까지 두 부부의 인생은 한편의 영화와 같았다. 고 신상옥·최은희 부부는 자유 대한민국의 가치와 우월함을 세계에 각인시킨 진정한 자유인이었다. 두 분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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