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1167년 봄, 전진도교의 창시자 왕중양은 마옥 등의 제자와 함께 산동성 동쪽의 곤유산(昆崳山)에 전진암을 세우고 수도할 때 19세인 서하(栖霞) 출신 구처기(邱處機)가 찾아왔다. 왕중양은 자를 통밀(通密), 도호를 장춘진인(長春眞人)으로 정하고 제자로 삼았다. 구처기는 전진칠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도사로 성장했다. 왕중양은 제자들을 혹독하게 다루며 의지를 시험했다. 대부분 고통을 이기지 못해 떠났지만 전진칠자만은 그 과정을 이겨냈다. 어느 날, 왕중양이 봉래각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갑자기 강풍이 불어 바다에 빠졌다. 모두 놀라 우왕좌왕할 때 다시 바다 속에서 솟아올랐다. 그의 몸은 말짱했지만 머리에 꽂았던 비녀가 사라졌다. 잠시 후에 비녀도 떠올라 저절로 다가왔다.

1170년 1월, 왕중양이 등선하자, 구처기는 스승의 시신을 그의 고향에 묻고 3년 동안 시묘한 후 강태공이 낚시하던 석번계(石番溪)에서 7년 동안 수도했다. 이 시기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도롱이 하나와 삿갓 하나만 지니고 다녔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사의(蓑衣)선생이라고 불렀다. 그의 도학은 이미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금세종 완안옹(完顔雍)은 1188년부터 자주 그를 불러 이야기를 듣고 엄청난 돈을 하사했지만 정중히 사양했다. 동년에 연경에서 칭기스칸을 만나 3년 동안 머물다가 산동으로 돌아와 서하의 곤유산과 청주(靑州)의 운문산(雲門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북송의 도사들은 허황된 귀신을 논하거나 사원을 짓기에 바빴으며, 속인들보다 더 타락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도교를 혐오했다. 왕중양과 그의 제자들은 모두 학문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 출신이었다. 그들이 종리권과 여동빈을 신봉한 것은 도교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종리권과 여동빈은 불교 선종이 심성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고, 양기(養氣)와 수신(修身)이 내단(內丹)이라는 교리를 확립했다. 그들이 주장하는 청정한 삶, 고아한 수양, 장생과 건강이라는 교리는 사대부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다. 전진교는 도교를 이러한 사대부들의 요구에 맞추었다. 왕중양은 불합리한 기존 도교의 의식을 완전히 거부했다.

1195년, 구처기, 유장생(劉長生) 등 7명이 노산에서 대규모 강론회를 열었다. 전진파 총림을 새로 정비하고, 처첩을 거느리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내공수련에 전념한다는 교의를 확정했다. 개혁으로 전진파는 북종 최대의 교파로 성장했다. 구처기는 노산의 동굴을 옮겨 다니며 수행했다. 지금 노산 곳곳에는 그가 수행하던 자취가 남아 있다. 1219년, 구처기를 초빙하기 위해 징기스칸과 남송 황제가 보낸 사신이 같은 날 도착했다. 많은 사람들은 남송황제에게 먼저 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처기는 몽고군이 백성들을 살육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1221년, 구처기가 먼 길을 걸어 서쪽 대설산(大雪山)에서 칭기스칸을 만났다. 칭기스칸이 불사약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나은 불사약은 없습니다.”

구처기가 수행하던 산동 노산을 다녀왔다. 문득 거기에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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