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현 문학박사

▲ 성주현 문학박사ⓒ천지일보(뉴스천지)
1898년 영학당의 흥덕항쟁은 이화삼의 체포로 막은 내렸지만 동학의 저항정신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것은 이듬해 1899년 동학혁명의 무대였던 호남지역에서 재현되었다. 동학의 정신을 계승한 영학당은 동학혁명에서 이루지 못한 뜻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 영학당의 기포는 정읍의 최익서가 주도하였다.

최익서는 동학혁명 당시 손화중의 연원에서 활동하였다. 최익서는 처음에 부안대접주로 활동하였던 김낙철과 함께 기포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김낙철은 동학혁명의 상처가 제대로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기포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라 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이에 최익서는 영학당의 이름으로 기포를 한 것이다.

영학당은 서울을 공격하여 새로운 사회와 정권을 수립한다는 원대한 포부로 통문을 돌려 기포를 하려고 하였다. 최익서의 영학당은 고창에 있던 이화삼이 광주로 이송하는 날 1899년 4월 18일 고부를 습격하였다. 이는 전봉준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동학혁명의 단초를 마련하였던 것과 동일한 방법이었다.

 고부를 습격한 영학당은 ‘보국안민’을 기포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방문을 게시하였다. 고부에서 무기를 획득한 영학당은 20일 흥덕, 21일 무장, 22일 고창을 점령하였다. 영학당이 점령한 곳은 1894년 동학혁명 당시와 동일한 루트였다.

고창을 점령한 영학당은 ‘보국안민’이라고 쓴 깃발을 내걸었다. 이어 영학당은 총과 창검을 들고 고창군 서쪽 수정(藪亭)으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비를 피하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무엇보다도 화승총은 비에 젖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마침 매복 중이던 수성군의 기습으로 영학당은 총 한 번 제대로 쏘아보지도 못하였다.

즉 전투를 해보지도 못하고 패전하고 말았다. 수성군은 패주하는 영학당을 고부까지 추격하였고, 여기에 보부상도 덩달아 영학당을 끝까지 색출하였다. 보부상은 동학혁명뿐만 아니라 영학당까지 탄압하는데 이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는 영학당 진압을 위해 강화지방대 2백 명을 파송하였다. 또한 영학당 일부가 목포로 향한다는 소문을 돌자 일본 함정 마야호가 목포로 향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영학당의 재기포를 염려하여 병정 210명을 고부, 태인, 흥덕, 정읍, 부안 등 각 지역에 배치하였다.

이와 같은 영학당운동은 동학혁명과 마찬가지로 동학의 보국안민과 반봉건 반제국의 성격을 그대로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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