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현 문학박사

▲ 성주현 문학박사ⓒ천지일보(뉴스천지)
1894년 동학혁명은 한국 근대사에 미친 영향은 실로 적지 않다. 한국 근대사에서 근대의 기점을 어느 시점으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동학의 창명되는 1860년을 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여기에는 ‘동학혁명’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동학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조선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호남지방을 비롯하여 호서지역, 영남지역, 강원지역, 해서지역 등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포되었던 동학혁명은 1895년 1월을 기점으로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혁명에 참여하였던 동학군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달려있었다.

정부는 관군을 동원하여, 지방에서는 유림 보수 세력이, 뿐만 아니라 동학군과 적대적 관계에 있었던 보부상까지 민보군, 유회군, 의회군 등을 조직하여 동학교인의 목숨을 조여 왔다. 이 외에도 동학혁명이 실패하는데 절대적 영향을 미친 일본군도 동학교인을 색출해 내는데 혈안이었다. 동학혁명 이후 동학교인들의 삶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한 마디로 ‘간난신고(艱難辛苦)’였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작통제’를 실시하여 동학교인들을 토벌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동학군들은 여전히 반봉건 반제국의 투쟁을 이어가기도 하였다. 이들을 영학당(英學黨)이라고 부른다. “겉으로는 영학을 칭하지만 내실은 전일의 동학”이라고 할 정도로 여전히 동학을 계승하였다. 대표적인 영학당 운동은 1898년 11월(음) 흥덕항쟁과 1899년 4월(음) 고부, 흥덕, 무장, 고창에서의 투쟁이었다.

흥덕항쟁은 1898년 11월 15일부터 18일까지 전개되었다. 그 원인은 군수 임용현의 부정행위 때문이었다. 임용현의 부정은 다섯 가지였는데, 조세 수취의 가혹성, 남의 땅을 함부로 팔고 그 돈을 착복한 일, 뇌물을 받고 하급관직을 판 일, 세금으로 저렴하게 산 쌀을 비싸게 무역한 일 등이었다. 이러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이화삼, 송민수 등은 기포하기로 하였다.

이화삼은 동학혁명 당시 접주로 충남 면천에서 기포하였으며, 나주에서 피체되었던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들은 11월 15일 꽹과리와 나팔을 울리며 3백여 명의 동민을 소집하였다. 16일 새벽 이들은 흰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죽창과 나무 몽둥이로 무장한 후 흥덕관아를 습격하였다. 동헌으로 들어간 이들은 창호를 부수고 군수를 끌어내고 관물을 탈취하며 서리를 구타하였다.

그리고 관인을 탈취하였다. 관인은 왕명을 받은 군수의 행정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영학당은 이를 이용하여 군의 행정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군수의 부정행위를 개혁하기 위해 관아를 점령한 영학당은 이화삼의 주도로 민회를 개최하였다. 민회를 통해 군수를 흥덕군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이화삼은 군행정에 위압감을 느껴 군수를 복귀시키고자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동원된 이들을 귀가시킴으로써 흥덕항쟁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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