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경임시정부청사 앞에서 귀국을 앞두고 찍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한국독립당원들 (출처: 작가 박건웅씨)ⓒ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12
중경임시정부청사 앞에서 귀국을 앞두고 찍은 임시정부요인들과 한국독립당원들 (출처: 작가 박건웅씨)ⓒ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12

임시정부 수립 과정과 활동
일제 영향력 덜 미친 상하이
외교 활동 전개에 유리해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1919년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상하이(상해)에 설립한 망명정부다.

1919년 2월 8일,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는데 이는 3.1운동의 불씨가 됐다. 또 국내외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시키는 구심점 역할을 하는 정부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고, 이를 통해 임정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임시정부, 경성의 한성정부 등 국내외에 다수의 임시정부가 있었다. 이는 각각 다른 조직체로 구성돼 있었지만, 통합 과정을 거쳐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국내가 아닌 상하이에 임정을 수립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상하이가 일제의 영향력이 덜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공사관이 있고 외교 활동 전개를 하기에 편리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는 이런 점을 고려했다.

임정은 자유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기본으로 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대통령제를 채택해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후 몇 차례에 걸쳐 헌법을 개정하면서 변천했다. 최종적으로는 김구가 주석이 돼 광복이 될 때까지 임정을 이끌었다.

임정은 어떤 일에 주력했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외교활동’이었다.

먼저 김규식을 파리 강화 회의에 민족 대표로 파견해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고,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설치해 미국 정부와 국민에게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하지만 파리 강화 회의에는 일본이 전승국으로 참여했고, 강대국의 외면으로 독립에 대한 내용이 주목받지 못했다.

임정은 또 연통제(자금 및 연락용) 조직을 만들어 국내 각 지역의 독립운동을 지도했다. 독립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임정은 일제의 탄압과 점령을 피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등지로 옮겨 다녔다. 그러다 1940년 중국국민당 정부의 임시 수도인 충칭에 정착했고, 1945년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후 김구 주석이 이끄는 임시정부 요원들은 27년 만에 꿈에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다. 비록 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지만 국민은 임시정부를 열렬히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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