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함평 출신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군무장·재무장 등을 역임한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전경. (제공: 함평군)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9
전남 함평 출신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임시정부 군무장·재무장 등을 역임한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 전경. (제공: 함평군)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9

김철 생가터 임시정부청사 재현
기념관에는 일강 일대기 기록
임시정부 군무장·재무장 역임

[천지일보 함평=김미정 기자] 4월 8일은 지난 1919년 함평 문장 장날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9년주년이 되는 날이다. 

전남 함평은 일강 김철 선생을 비롯해 해외독립운동가로 안후덕, 문기호, 이도범, 김덕근, 김석 등 많은 독립투사가 있을 정도로 독립운동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

호남의 대표적인 애국지사가 있는 함평에서 일강 김철 선생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를 찾아 선조들이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를 찾아보자.
 
일강 김철 선생은 1886년 10월 15일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출생했다. 현재는 이 자리에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세워져 있다. 

김철 선생이 태어난 자리에 기념관이 있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세워진 배경이 있을까. 

상해임시정부청사가 세워질 당시 김철 선생은 재무장이었다. 따라서 상해임시정부청사의 명의를 김철 선생의 이름으로 한 것이 인연이 돼 함평군이 일강 김철 선생기념관을 세우면서 선생이 태어난 자리에 상해임시정부청사를 건립한 것이다. 

단순히 건물을 똑같이 만든 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다. 건물 안의 사무실, 회의장, 김구 주석이 머물었던 곳, 화장실까지 당시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유품과 유물로 재현해 놨다. 

말 그대로 상해임시정부청사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김철 선생의 양손자인 김만선(64)씨는 “본래 취지는 그분들(독립투사)이 사용했던 것을 통째로 가져와서 세우려고 했다”며 “그러나 너무 오래돼서 소실되고 좀먹고 부패해 그렇게는 못 하고 그때 당시 것을 구해서 똑같이 재현해 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시실에 있는 실제 상해임시정부청사 사진 자료.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9
전시실에 있는 실제 상해임시정부청사 사진 자료.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9

상해임시정부청사는 총 3층 건물로 되어 있다. 입구에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상해임시정부청사 앞마당에는 안중근 장군 기념 동상이 우뚝 세워져 있다. 

이곳 안중근 장군 기념 동상이 다른 곳과 차이점이 있다면 안중근 의사라는 명칭에서 장군으로 불리면서 처음으로 세워진 동상이라는 점이다. 

상해임시정부청사 1층 입구를 들어서니 마치 그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로 임시정부회의실, 김구 선생 집무실, 정무집무실이 그대로다. 

김만선 씨는 “상해를 다녀오신 분들도 똑같다고 흡족해한다”며 “당시 계단 폭, 넓이, 높이까지 침구, 커튼, 그릇, 잡기, 찻잔 하나하나 모두가 다 그 시대의 것”이라고 말한다. 

2층 김구 선생 집무실 앞에는 1927년 12월 28일 독립운동가가 김철 선생과 함께 김구 선생을 만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전략) 나를 사지로 보내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셨다”는 문구를 읽으니 그 시대 어떤 마음으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다. 

3층까지 집무실을 다 보고 나면 전시실이 펼쳐진다. 전시실에는 태극기 앞에서 선서하고 기념촬영을 했던 독립투사들의 사진, 함평 문장 4.8 독립 만세운동에 대한 내용을 볼 수 있다.

잔혹한 고문의 역사를 비롯해 일제 침략기 탄압 및 고문의 내용 등 관련 사진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48인의 한 명인 김지환 선생의 ‘초목에 맺힌 이슬까지도 망한 민족의 눈물인가!’, 안창호 선생의 ‘이 한 몸 돌보지 않고 나라에 몸 바쳐 만 번 죽더라도 앞으로 나갈 것을 하느님과 조상에 맹세하노라’ 등의 글을 보노라니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과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상해임시정부청사와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을 관리하는 김만선씨는 “우리가 여기 왔다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이런 문구 하나라도 가슴에 담고 가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조그만 것 하나만 잃어도 사소한 것 하나만 남에게 빼앗겨도 서러운데 나라를 잃은 서러움은 어디에 비교하겠느냐”며 선조들에 대해 고마움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한다.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김철 선생 소개 자료.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9
기념관 내부에 전시된 김철 선생 소개 자료.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9

상해임시정부청사 오른편에 있는 일강 김철 선생 기념관에는 김철 선생의 일대기를 살펴 볼 수 있다. 

김철 선생은 1915년 일본 메이지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1912년도에는 서울대학교의 전신인 경성법률전문학교를 수료했다. 그래서일까 1917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김철 선생은 1919년 4월 제1회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으며, 교통총장 직무대리, 군무장(오늘날 국무장관), 재무장(오늘날 재무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함평에서는 집이 6채가 있을 정도로 부유했던 김철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활동하면서 자신의 재산을 팔아 독립자금으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김철 선생이 작성한 ‘유조선국’이라는 비는 대한민국이 남의 나라가 아닌 우리의 것임을 증거하는 귀한 자료로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인해 그 비가 무너져 땅에 파묻히기도 했다. 현재는 영광 불갑사 들어가는 입구에 김철 선생 기념비와 함께 나란히 세워져 있다. 

또 기념관 왼쪽에는 큰 소나무가 서 있는데 이 소나무는 김철 선생이 독립투사로 가면서 홀로 남은 아내 김정자 씨가 독립운동하는 데 방해가 될까 봐 자결한 곳이어서 ‘단심송’이라 불리게 됐다. 

전국 곳곳에는 봄 축제로 떠들썩하기 시작했다. 함평도 나비 축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히 즐기고 다녀가기보다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해 준 일강 김철 선생의 기념관과 상해임시정부청사를 둘러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김구·안창호·김철 선생이 의형제를 맺으며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을 느껴보고 싶다면 이곳 상해임시정부청사와 일강 김철 선생기념관을 꼭 찾아보길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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