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 문제 보더니 ‘흐뭇’… 조선시대 장원급제 비결은?
과거시험 문제 보더니 ‘흐뭇’… 조선시대 장원급제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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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0년대 조덕순 문과 장원 급제 시권(전면)(위)과 1660년 박세당 문과 장원 급제 시권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7
1690년대 조덕순 문과 장원 급제 시권(전면)(위)과 1660년 박세당 문과 장원 급제 시권 (제공: 한국학중앙연구원)ⓒ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7

한중연 ‘선비의 답안지’ 발간
조덕순, 여론 탐문부터 시작
박세당, 별시서 거침없이 대답
출제자의 의도 파악이 중요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책을 달달 외우면 시험 성적이 잘 나올까.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은 대체로 ‘출제자의 의도 파악이 중요하다’고 답한다. 의도를 알면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과거제도가 있었는데, 장원 급제 한 사람들도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험에 대비했다.

◆‘가장 급선무는 무엇?’ 조덕순의 질문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발간한 ‘선비의 답안지’ 서적에 따르면, 1690년 경상도 영양 주실마을에 사는 조덕순(1652~1693)이란 선비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그는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사람들에게 ‘지금 가장 급선무가 무엇이오’라고 물었다. 일종의 여론 탐문이었다. 문과 응시생이라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기에 여론 조사는 중요했다.

사람들은 ‘도둑 문제’를 화두로 삼았고, 조덕순은 치안 문제가 나라의 새로운 근심거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밤새도록 대안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시험문제 출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과장에 들어간 조덕순은 시험 문제를 받자마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여론이 시험문제로 나온 것이었다.

과거는 현실이고 현실에 귀 기울인 조덕순. 그는 도적을 다스리는 방책으로 경찰력의 증강, 법 집행의 엄정함 같은 물리적 처방보다는 ‘교화’라는 인정(仁政)을 통한 근본적 처방론을 강조했다. 거기에는 도적도 국왕의 백성이고, 조선의 선민이라는 동포의식이 깔렸었다. 남들보다 앞선 고민을 한 조덕순의 대답은 다른 응시생보다 수준 높았다.

현실에 대한 파악, 예비 치자(治者: 한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자)가 지녀야 할 애민정신에 바탕한 고민, 숙려가 그를 장원 급제로 이끈 것이다.

◆최고 권력 비판한 박세당

1660년(현종 1)에는 증광문과의 시험관들은 국가 재정 운영의 원칙을 물었다. 이에 박세당(1629~1703)은 국가 관리 시스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백성이 풍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하지 않을 수 있으며,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풍족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왕자(王者)는 사사로운 재물이 없다”는 표현을 함으로써 군주의 자세를 환기시켰다.

특히 박세당은 왕실의 ‘축재(蓄財)’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박세당은 하찮은 토공(土貢, 세금)일지라도 전부 지관(地官, 재정 담당 부서)이 관장하고 왕실의 재정적 간섭을 원천 차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답안을 작성해 장원으로 합격했다.

사실 이 대답은 국왕이 언짢을 수 있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떻게 합격한 걸까. 이는 박세당이 치른 별시의 특성 때문이었다. 별시는 현종의 즉위를 기념해 열렸는데, 집권 초기 다양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한 자리여서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았다. 박세당의 답안지 어투가 거침이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즉, 박세당이 별시의 특성과 분위기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합격자 퍼레이드 ‘삼일유가’

합격자 발표 후 3일 동안은 성대한 풍악 속에서 거리 행진이 이어졌다. 이때 홍패(紅牌: 문무과 합격증서)나 백패(白牌: 생원시·진사시·잡과 합격증서)를 앞세우며 광대의 흥겨운 공연이 이어졌는데, 삼일유가는 합격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고 부모에게도 커다란 기쁨이었다.

하지만 사헌부는 가뭄이 심해지자 급제자 유가를 정지할 것을 청하게 된다. 이에 성종(조선 제9대 왕)은 “유가는 선비를 권면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전대의 고사이니 폐할 수 없다”고 하교했다. 또한 숙종(조선 제19대 왕)은 “인간 세상의 영광 중에 과거 급제가 으뜸이고, 삼일유가도 은택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18세기의 문예군주 영조도 “대개 선비는 평생 힘써 공부하여 단지 사흘 동안 부모를 영화롭게 한다. 만약 사고가 있어 유가할 수 없다면 필시 쓸쓸한 마음이 들 것이다. 당시에 방방을 반드시 가을 즈음에 시행한 것은 이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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