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희윤 피랍탈북인권연대 대표, 북한인권증진자문위원

 

북한의 언어 중에 ‘눈석이’라는 단어가 있다. 탈북인들을 비롯해 북한주민이면 누구나 이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겠지만, 필자를 비롯한 남한사람들은 생면부지 처음 듣는 말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인터넷상의 어학사전에서 눈석이를 찾으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눈석임(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의 북한어. 이것을 탈북인들에게 물어보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겨울에 쌓인 눈이 속에서부터 녹아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현상’으로, 겨울 내내 꽁꽁 얼어붙은 눈이 녹아내리는 봄맞이를 뜻하는 단어라고 말이다.

필자가 눈석이라는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북한내부의 저항작가 반디선생의 시집 ‘붉은 세월’에서 남한의 라디오방송을 몰래 숨어서 듣는 북한주민의 심정을 그린 작품에서였다. 남한에서는 한물 간 라디오지만, 깨어있는 북한주민들은 자신의 목숨과 바꿀 만한 위험을 감수하며 숨죽여 애타게 듣는 것이 바로 대북 라디오방송이다. 반디선생의 표현을 그대로 옮긴다.

‘봄 동산의 봄소식 전하여주고, 봄이 오는 봄노래 속삭여주며
이 가슴에 눈석이 흐르게 해준, 아! K.B.S. 사회교육방송이여, 님의 사랑이여!’

얼마 전 평양에서 개최된 남한 문화예술인의 공연 제목이 ‘봄이 온다’였다고 한다.

평양시민들의 환호성과 김정은의 공연관람으로 진짜 봄이 오려나 하는 기대감의 증대도 나타나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이런 식의 봄소식은 20여년 전에도 찾아왔던 바, 수십만명에 달하는 관광객이 금강산을 넘어, 개성, 평양을 오갈 때 모두들 한반도에 봄이 시작된 줄 착각했었다. 그때도 여전히 봄소식은 남북한의 일부 세력들에게만 느껴졌었고 급기야 빙하기의 10년이 한반도를 얼어붙게 하였으며, 꽁꽁 얼어붙은 근본원인의 치유가 전혀 되지 못한 현시점에서도 또 봄이 오니 어쩌니 하고 있으니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대략난감일 뿐이다.

노예로 사는 북한주민들의 가슴에 눈석이처럼 봄기운을 느껴야 진짜 봄이 오는 게 아닐까.

얼마 전 해외언론들은 북한당국이 작년에 있었던 김정은의 연설을 토대로 비사회주의의 섬멸전을 벌릴 계획으로 ‘비사회주의 그룹빠’라는 것을 만들어 주민들의 단속에 돌입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소위 ‘비사 그룹빠’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이 조직은, 주민들 간에 새로운 유형의 사회일탈 행위가 빈발함에 따라 인민보안성의 주관하에 보위성, 검찰 등과 합동으로 주민들의 각종 생활들을 단속하는 것이 주요임무이다.

평양에서의 남조선 예술단의 공연을 정확히 예견이라도 하듯, 수개월 전부터 남조선의 자본주의 날라리 풍조를 차단하고 예방교육을 한다는 차원에서 그 같은 초법적 조직을 만들었다는 것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제대로 알고 있을까.

또한 이런 초법적 조직의 감시, 단속활동으로 대다수 선량한 북한주민들에게는 오히려, 남북한의 급조된 교류로 인해 생활은 한층 피폐해지고 인권은 더욱 유린당한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인식하고 있을지 실로 의문이다.

북한 노동당 핵심 간부들의 환호성만으로 봄이 왔음을 느꼈다는 남한 연예인들에게, 북한 노예주민의 가슴에 눈석이 같은 봄이 오기를 함께 기도하자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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