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지난달 29일부터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한국서예사특별전 34 : 명재 윤증’ 전(展)을 개최했다. 5월 13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1629~1714)의 유물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이다. 사진은 조선후기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분화의 시발점인 ‘신유의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지난달 29일부터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한국서예사특별전 34 : 명재 윤증’ 전(展)을 개최했다. 5월 13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1629~1714)의 유물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이다. 사진은 조선후기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분화의 시발점인 ‘신유의서’,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기획
논쟁 시대 속 화합·평화 추구
‘신유의서’ 전하지 않고 보관
손자가 몰래 베껴 적어 전달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시대의 치열한 논쟁 시대를 겪으면서도 언제나 화합과 평화를 추구한 인물인 ‘명재 윤증(1629~1714)’. 그는 86년간의 삶에서 단 한 번도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지만 소론의 영수(領袖:우두머리)로 추앙된 백의정승(白衣政丞)이다.

이와 관련,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은 ‘한국서예사특별전 34 : 명재 윤증’ 전(展)을 열었다.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인 명재 윤증의 유물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제공: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5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소장.(제공: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5

◆노론과 소론 분화의 시작

역사적으로 보면, 윤증은 아버지 윤선거의 두터운 벗이었던 우암 송시열에게 ‘주자대전’을 수학한다. 윤선거는 아들 윤증에게 “송시열은 특출난 사람이니 좋은 점을 본받되, 그의 병통 또한 몰라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송시열은 윤증을 두고 자신의 제자 중에서 으뜸이라고 말할 정도로 윤증의 학문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사제 관계가 무너지는 두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첫 번째는 경신환국 때 남인의 영수 윤휴를 정치적인 일로 송시열 등 서인에서 죽이는 일이다. 이때 윤증은 매우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반대파인 남인일지라도 죽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윤증이 생각한 것이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후기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분화의 시발점인 ‘신유의서’, 과거에는 종이가 귀하다보니, 조선 3대 명문가 집안인 명재 윤증도 종이를 재활용해 사용했다. 종이가 말려있는 부분(왼쪽)에 원래부터 적혀 있던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조선후기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 분화의 시발점인 ‘신유의서’, 과거에는 종이가 귀하다보니, 조선 3대 명문가 집안인 명재 윤증도 종이를 재활용해 사용했다. 종이가 말려있는 부분(왼쪽)에 원래부터 적혀 있던 글자가 선명히 남아 있다.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2

김학명 서예부 큐레이터는 “윤증은 ‘신유의서’를 지어서 송시열을 비판하려고 했다. 하지만 박세채 등의 만류로 신유의서를 송시열에서 보내지 않았다”라며 “3년 뒤 송시열의 손자이자 박세채의 사위였던 송순석이 이를 몰래 베껴 송시열에게 보여주고 이에 격노한 송시열이 윤증과의 관계를 끊어버렸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사건은 윤증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송시열에게 묘갈명을 부탁하면서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자신이 훗날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인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못한 것에 불만을 갖고 있었기에 무성의하게 풍자적인 묘갈명을 지어줬다. 이후 윤증이 몇 차례에 걸쳐 수정을 청했으나 송시열은 끝내응하지 않았다.

윤증과 송시열의 이 같은 갈등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를 송시열의 거주지인 ‘회덕’, 윤증의 거주지인 ‘이성’의 앞 글자를 따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부른다.

영당기적(작자 미상-1885년) (제공: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5
영당기적(작자 미상-1885년) (제공: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천지일보(뉴스천지) 2018.4.5

◆명재 종가서 간직한 보물 공개

이번 전시에는 ‘윤증 초상’과 ‘영당기적’ 두 점의 보물이 공개됐다. 윤증 초가에 전해 내려오는 초상 5점과 초상 제작관리 내력이 상세히 적힌 ‘영당기적’은 2006년 보물 제1495호로 일괄 지정됐다. 전시에는 이명기가 1788년에 구법으로 그린 초상이 ‘영당기적’과 함께 전시됐다.

윤증의 초상은 생전에 변량이라는 화가가 처음 그린 후 윤증 사후 장경주, 이명기, 이한철 등에 의해 제작됐다.

1723년 조선의 20대왕 경종이 내린 윤증 ‘시호 교지’도 공개됐다. 명재 윤증의 집안은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를 46명이나 배출할 만큼 명문가였다. 그의 집안에서 시호를 받은 인물은 9명이다. 특히 윤증(문성공)은 조부인 문정공 윤황, 아버지 문경공 윤선거와 함께 3대에 걸쳐 시호를 받았다. 윤증이 주변 인물과 주고받은 ‘간찰’도 공개됐다.

이는 조선시대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또 송시열, 김장생, 윤휴, 박세당, 허목 등 당대 최고 학자의 친필을 그대로 확인할수 있는 다양한 간찰 자료도 전시됐다.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지난달 29일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한국서예사특별전 34 : 명재 윤증’ 전(展)을 개최했다. 5월 13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1629~1714)의 유물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이다. 사진은 관람객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2018.4.2
[천지일보=장수경 기자] 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이 지난달 29일 서울서예박물관에서 ‘한국서예사특별전 34 : 명재 윤증’ 전(展)을 개최했다. 5월 13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조선 후기 정치사의 핵심 인물이자 소론의 영수(領袖)인 명재 윤증(1629~1714)의 유물을 통해 그의 삶과 사상을 체계적으로 선보이는 전시이다. 사진은 관람객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2018.4.2

김 큐레이터는 “윤증은 갈등을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고 존중하고자 한 인물”이라며 “역사적으로 송시열의 관계를 다르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윤증이 ‘싸우려고 싸웠다 라기보다는 싸우지 않기 위해 싸웠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고 말했다.

김 큐레이터는 “‘신유의서’는 윤증이 송시열의 관계에서 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학문적·논리적으로 기록한 글”이라며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생각과 사상 등을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것을 윤증을 통해 배워야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한국서예사특별전 34 :명재 윤증’ 전시는 오는 5월 13일까지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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