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70주년’ 3만명 목숨 앗아간 근현대사의 비극… “진상규명 나서야”
‘제주 4.3 70주년’ 3만명 목숨 앗아간 근현대사의 비극… “진상규명 나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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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당시 죽창 들고 보초서는 여인들. (제공: 제주 4.3 평화재단)
4.3사건 당시 죽창 들고 보초서는 여인들. (제공: 제주 4.3 평화재단)

1947년 ‘3.1절 발포사건’ 발단

2003년, 진상조사보고서 발간

‘4.3특별법’ 개정안, 국회 계류

[천지일보=임혜지 기자] 국가폭력에 의해 수백만의 무고한 제주 양민이 학살을 당했던 ‘제주 4.3’이 올해로 70주년을 맞았다.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국가권력에 의해 은폐되고 왜곡된 제주 4.3의 진실을 요구하는 시민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제주 4.3의 역사와 의미를 정리해봤다.

‘제주4.3’의 시작

미군 정기에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4·3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이 난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 전 지역에서 무려 3만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7년 3월 1일에 발생한 ‘3.1절 발포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삼일절 기념 대회를 마친 제주도민들이 ‘반미 시위’를 벌였고, 이때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하게 된다.

이후 도민들은 경찰 발포에 극렬히 항의하며 ‘총파업’에 돌입했다. 관공서, 민간기업 등 제주도 전체의 직장 95% 이상이 참여한 당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이었다.

하지만 군경의 억압과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 가운데 좌익에 대한 적개심이 컸던 ‘서북청년회’까지 경찰의 입장으로 섬에 들어와 주민들을 대상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민심은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이듬해 3월 4일, 조천중학교의 김용철 학생이 고문치사로 사망하는 일이 발생하자 제주 사회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극한의 위기상황으로 변해갔다. 결국 도민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다”를 선언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앉아서 죽느냐, 서서 싸우느냐’의 선택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무장한 350여명의 도민들은 12개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 이로 인해 경찰 등 14명이 사망했다.

같은 해 10월 17일, 군은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3만명이 넘는 도민들이 희생되는 비극의 서막이었다. 송여찬 9연대장은 “해안선에서 5㎞ 이상 지역은 적성 구역으로 간주하고, 그곳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사살 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1950년 8월 20일엔 모슬포 절간 고구마창고에 구금됐던 132명이 집단 학살됐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개방되기 전까지 무력 충돌과 진압이 이어졌고 주민들은 무참히 죽어 나갔다. 해안마을로 내려왔어도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그 자리에서 총살을 당했다.

2007년 12월 4일 ‘제주공항 1차유해발굴’에서 뒤로 손이 묶인 채 발견된 유해. (제공: 제주 4.3 연구소)
2007년 12월 4일 ‘제주공항 1차유해발굴’에서 뒤로 손이 묶인 채 발견된 유해. (제공: 제주 4.3 연구소)

특히 초토화 작전이 단행된 한라산 산간지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희생이 컸다. 한 생존자는 “남편이 끌려가 불안한 마음에 서성거리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다”며 “급히 현장에 가보니 쇠줄로 목이 묶인 채 총에 맞은 36구의 시신이 나뒹굴고 있었다”고 당시의 끔찍함을 증언했다.

◆제주4.3, 세상에 알려지다

4.3의 폭풍이 그친 1956년, 일부 유족들은 희생당한 채 방치된 132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제주 도민이 한국군에 의해 억울하게 총살당한 지 6년만의 일이다.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학살 사실을 은폐하고자 시신 수습을 막았기에 장기간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유족들은 수습한 시신을 한데 모아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 곳에서 죽어 뼈가 엉기어 하나가 됐으니 그 후손들도 모두 한 자손’이라는 의미로 ‘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묘비를 세웠다.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오랜 기간 동안 제주 4.3은 언급해선 안 되는 단어였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끝나고 국회에서는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져 학살 피해 접수가 잠시나마 이뤄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다시 4.3은 긴 침묵 속으로 빠지게 된다.

이처럼 감춰졌던 4.3의 진실은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화 열기로 인해 조금씩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진실을 알리기 위한 도민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공포됐고, 2003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됐다. 같은 해 10월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공식 사과했다. 희생자들의 짓눌렸던 억울함이 조금이나마 풀리는 순간이었다. 최근인 2014년에는 ‘4.3 희생자 추념일’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됐다.

2007년 8월 21일 제주시 용담2동 제주공항 인근에서 열린 ‘제주공항 1차유해발굴 개토제’ (제공: 제주 4.3 연구소)
2007년 8월 21일 제주시 용담2동 제주공항 인근에서 열린 ‘제주공항 1차유해발굴 개토제’ (제공: 제주 4.3 연구소)

현재 유족들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4.3특별법’ 개정안‘에 주력하고 있다.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공권력에 의한 억울한 희생에 대한 배상과 보상,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은 군사재판의 무효화, 4.3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 진실 규명을 위한 추가조사, 트라우마 치유센터 건립 등이다.

이에 대해 양시영 제주 4.3 희생자 유족회 사무국장은 4.3특별법을 정부에서 최우선적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4.3 피해 당사자들이 벌써 90대를 넘긴 고령의 나이지만, 4.3특별법은 소위원회 심사조차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정부는 특별법을 시급히 개정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양 국장은 4.3 희생자와 피해자들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국가의 지속적인 사과가 필요하다고도 했다. 그는 “피해자들이 살아있는 한 4.3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국가의 사과는 지속돼야 한다”면서 “특히 국가는 피해자들을 직접 찾아뵙고, 그 한을 보듬으려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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