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고대 중국 한나라의 영웅으로 유방을 도와 천하를 제패한 한신. 그는 불우한 시절을 이기고 온각 굴욕적인 삶 속에서도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정작 제2인자가 돼서는 주군으로부터 배신을 당한다. 유방은 한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후환을 없앴다. ‘사냥꾼은 사냥이 끝나면 개를 삶아먹는다’는 토사구팽이란 유명한 고사를 만들었다.  

역사를 보면 킹메이커였던 2인자들의 만년이 불행했다. 조선 역사에서도 그런 사례는 여럿 찾을 수 있다. 권력을 잡으면 겸양을 잃고 정도(正道)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 때 이숙번은 무관출신으로 왕자의 난을 주도해 신임을 얻었다. 개국공신인 정도전을 살해한 것도 이숙번이다. 이 공으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됐다. 

그러나 이숙번은 무인 출신으로 성격이 과격하고 지혜가 부족했다. 태종의 신임을 기화로 벼슬이 높아지자 기생들과의 잇단 염문과 부정부패로 비난을 받았다. 어느 날은 기생과 어울려 놀다가 태종의 부름에도 나가지 않았다. 결국 태종은 ‘이 같은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는가’ 하며 개탄했고 공신녹권을 회수했다. 죽이지는 않았으나 서울에서 먼 거리인 함양으로 유배시켰다. 

세조의 킹메이커 한명회는 팔삭둥이란 별명을 얻은 아주 특별한 인물이었다. 과거에 급제하지 않았으면서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자신의 두 딸을 왕비로 간택시킨 행운아였다. 한명회도 만년에는 임금까지 무시하다 배척당했다. 

한명회가 세조의 특별한 비호를 받은 것은 바로 생명의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있을 즈음, 성삼문의 부친 성승(成勝)은 별운검이었다. 별운검(別雲劍)은 칼 명칭이지만 임금을 옆에서 시위하는 경호책임자다. 
명나라 사신을 위해 베푸는 창덕궁 잔치에서 세조를 시해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한명회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잔치에 별운검의 시종을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같은 계획이 밝혀지자 세조는 목을 쓸어안고 한명회의 은혜를 평생 잊지 않았다.   

한명회는 오만해지고 사치와 권력은 커져갔다. 이것이 그를 불행하게 만든 단초가 된다. 사위인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더욱 기세가 등등해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다고 자신의 별장인 압구정에 임금이 사용하는 채양을 달라고까지 하다 미운털이 박혔다.  

한명회의 운명이 비극으로 끝난 것은 죽은 후였다. 연산군 10년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윤비사사(賜死)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돼 부관참시당한 것이다. 시신은 토막이 났으며 머리는 한양 저자거리에 걸렸다.

드라마의 단골 소재가 되어온 명종 때 윤원형은 임금의 외삼촌으로 권력을 전횡하다 몰락했다. 첩이었던 정난정에게 휘둘려 축재를 하고 매관매직을 눈감아 주다 결국은 사림들의 비판을 받아 귀양지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승만 정권의 제2인자 이기붕은 4.19혁명으로 몰락, 온가족이 자살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제5공화국 시절 유력한 대권 계승자로 지목되었던 JP. 그는 권력 중심의 모함과 시기를 받아 부침했으며 풍운아라는 별명을 얻었다. 

요즈음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두고 부통령이니 제2인자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고 있다. 일부에서는 차기 대권주자로도 거명된다. 시중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 임 실장에게 행일까 불행일까. 

세종 때 황희나 맹사성, 선조 때 이이, 유성룡, 이항복, 영·정조 때 체재공은 도승지로서 이름을 빛낸 명신(名臣)들이다. 이들은 권력 중심에 있으면서도 겸양을 잃지 않았다. 도승지다운 간언으로 임금을 보필해 존경을 받았다. 따지고 보면 제2인자의 인생도 자신에 달린 것이며 정도를 잃지 않아야 빛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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